류현진·김광현·윤석민 부상 악몽은 끝! 이젠 ‘불꽃 투구’ 기대해도 좋아요~
20대 초반 젊은 투수였던 류현진(LA 다저스·당시 한화) 김광현(SK) 윤석민(KIA)이 국가대표 마운드의 주축으로 맹활약한 대회라 더 값졌다. 야구계는 “한국 야구가 10년짜리 국가대표 에이스들을 찾았다”고 들썩였다. 실제로 이들은 이듬해 열린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도 나란히 출전해 준우승을 합작했다. 한국 야구는 국제대회에서 전성기를 누렸고, 야구 인기는 더 불타올랐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아직까지 당시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처럼 압도적인 국가대표 트리오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세 투수는 그동안 차례로 빛과 그림자를 경험했다. 올해는 세 명이 각기 다른 이유로 남다른 각오를 품고 출발하는 시즌이다. 류현진은 메이저리그에서, 김광현과 윤석민은 KBO 리그에서 각각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야구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놓인 세 명의 명품 투수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다시 커다란 날개를 달고 10년 전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까.
# 6년 계약 끝나는 류현진, 잭팟 터트릴까
류현진은 2013시즌을 앞두고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6년 총액 3600만 달러(최대 4200만 달러)에 사인했다. 올해가 계약 마지막 해다. 올 시즌 어떤 성적을 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행선지와 몸값에 큰 변화가 생긴다.
류현진은 KBO 리그에 메이저리그를 향한 문을 연 선수다. 한화에서 7시즌을 꽉 채운 뒤 2012년 말 해외 진출 자격을 얻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며 포스팅에 나왔다. 다저스는 포스팅 금액 2573만 7737달러 33센트를 적어 내 독점 교섭권을 따냈다. KBO 리그 출신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그 정도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야구의 경사이자 충격으로 여겨졌다. KBO 리그가 최초의 빅리거를 배출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출발도 눈부셨다. 류현진은 빅리그에 진출한 첫 2년간 연속 14승을 올렸다.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분류되던 클레이튼 커쇼와 잭 그레인키에 이어 팀 3선발로 활약했다. 그러나 꽃길이 끝나자마자 가시밭길이 찾아왔다. 2015년 어깨, 2016년 팔꿈치 수술을 각각 받았다. 오랫동안 마운드를 비웠다. 2년간 단 한 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다행히 지난해 무사히 터널을 빠져 나왔다. 다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랐다. 25경기 중 24경기에 선발 등판했고, 126⅔이닝을 던지면서 5승 9패 평균자책점 3.77을 기록했다. 첫 2년처럼 강하진 않았지만, 부상 없이 돌아와 풀 시즌을 소화했다. 앞으로의 활약에 대한 희망을 봤다.
2017년은 ‘재기’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류현진이 다시 메이저리그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2018년은 다르다. 2017년이 복귀의 한 과정이었다면, 내년엔 더 견고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류현진은 다저스가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동안 투구 폼에 변화를 줬다. 지난해 새 무기로 쏠쏠하게 써먹은 투심패스트볼도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결과에도 만족하고 있다. 어깨 수술 경력이 있는 만큼 몸조심은 필수. 스프링캠프 시작을 앞두고 현지에서 불거진 트레이드설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가치를 더 올리고 3년 전의 류현진으로 돌아오는 데 집중하고 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도 새 출발을 했다. 지난 1월 스포츠 아나운서 배지현 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야구 선수의 생활을 잘 이해하는 아내의 물심양면 내조 속에 좀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류현진에게 2018년은 여러 모로 기대되는 해다.
# 김광현의 역동적인 투구폼, 다시 빛을 발할까
김광현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함께 전성기를 맞았다. 올림픽이 열린 해인 2008년 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을 석권하면서 정규시즌 MVP로 뽑혔다. 2009년에는 평균자책점 1위, 2010년에는 다승 1위에 각각 올랐다. 특히 2010년은 17승, 193⅔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2.37을 기록한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그러나 이후 2년간 부상이 찾아오면서 부침을 겪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 연속 10승을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과거처럼 압도적인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그 사이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다 좌절되는 아쉬움도 겪었다.
김광현은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국내 잔류를 선택했다. 2016시즌을 마친 뒤 FA가 돼 원 소속팀 SK와 4년 총액 85억 원에 사인했다. 최초로 ‘100억 원’ 벽을 깰 선수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예상보다 낮은 액수에 계약했다. 부상 위험성 때문이다.
김광현은 1년간 착실하게 재기를 향한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지난해 9월 최대 고비였던 ITP(Interval Throwing Program·단계별 투구 프로그램)를 통증 없이 무사히 끝냈다. 10월에는 따뜻한 일본 가고시마에서 불펜피칭을 50개까지 소화했다. 입국 당시 김광현은 “목표했던 훈련량의 80~90%를 소화했다. 몸이 잘 만들어졌다”며 “그동안 ‘다시 던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자신감을 되찾았다. 개막전에 몸을 맞추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그 바람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상적으로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1월 초 플로리다로 먼저 떠나 마지막 재활 스케줄을 소화했고, 이후 1군 스프링캠프로 이동해 선수단에 합류했다. 2016년 이후 2년 만에 개막 엔트리에 합류할 확률이 높아졌다.
김광현의 부활을 기다리는 건 SK만이 아니다. 류현진과 쌍벽을 이루는 전국구 스타플레이어였던 김광현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야구계가 고대하고 있다. 호쾌한 투구 폼과 힘이 넘치는 피칭, 당당한 웃음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 SK는 수술 후 복귀 첫 시즌을 맞는 김광현의 왼팔을 보호하기 위해 6선발 체제를 운영하고, 시즌 전체 투구 이닝을 110이닝으로 제한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그 정도로 김광현은 SK의 보배다.
# 4년 계약 마지막 해, 윤석민이 벗어야 할 ‘유령 투수’ 오명
윤석민은 KIA가 사랑하는 토종 에이스였다. 2008년 14승을 올리면서 팀 주축 투수로 발돋움했고, 2011년 17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5의 성적을 올리면서 정규시즌 MVP로 등극했다. 류현진과 김광현이 국가대표 왼손 원투펀치였다면, 윤석민은 확실한 오른손 에이스였다. 팀에서 꾸준히 선발로만 뛴 류현진이나 김광현과 달리, 윤석민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마당쇠 역할까지 했다. 여러 모로 KIA에게는 값진 투수였다.
사진 제공 = 기아타이거즈
윤석민은 복귀 첫 시즌인 2015년 팀 사정상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51경기에 나서면서 데뷔 후 처음으로 30세이브 고지를 밟았다. 그러나 2016년에는 팔 상태가 좋지 않아 1군을 이탈해 있는 기간이 많았다. 1년간 31이닝을 던지면서 2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19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부상이 원인이었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오른쪽 어깨 위에 웃자란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당초 지난 시즌 중반 돌아올 계획이었다. 꾸준히 윤석민의 복귀를 점치는 기사도 나왔다. 후반기에는 합류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도 여러 차례 들렸다. 그러나 피칭 도중 부상이 재발해 다시 재활 과정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시즌이 끝났다. 팀이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팬들에게 ‘유령 투수’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몸만큼 마음도 고생했다.
지난 시즌의 우승 전력을 고스란히 지킨 KIA는 올해 윤석민이라는 ‘천군만마’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개막전 출전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윤석민도 차근차근 몸을 만들고 있다. KIA의 전지훈련지인 일본 오키나와로 미리 날아가 재활을 계속했다. 마운드에서 예전처럼 싸울 수 있는 투수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윤석민도 올 시즌을 끝으로 KIA와의 4년 계약이 종료된다. 명예 회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제 그 기다림의 끝이 다가온다. 그는 마지막 인내심으로 복귀일을 기다리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매덕스·글래빈·스몰츠 이런 투수진 봤수? 미국 역대 최강 트로이카 한 팀에…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은 모두 소속팀이 달랐다. 국가대표 팀에서 뭉쳐 최강 트로이카를 이뤘다. 만약 이 세 투수가 정규시즌에도 같은 팀에서 뛰었다면? 그 구단과 감독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장면이었을 터다. 미국에는 실제로 그런 행운을 누린 팀이 존재했다. 1990년대 애틀랜타 얘기다. 당시 애틀랜타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으로 꼽히는 선발 트로이카를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 트리오다.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는 1993년부터 2002년까지 10년간 애틀랜타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1980년대까지 약팀으로 분류되던 애틀랜타는 1990년대 들어 리그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이들 셋을 모두 보유하고 있던 10년간, 단 한 시즌(선수 노조 파업으로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않았던 1994년)을 제외하고 매년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에도 두 차례 올랐고, 1995년엔 월드시리즈 우승컵도 들어 올렸다. 10년 가운데 세 투수가 모두 선발로 뛴 시즌은 1992년부터 1999년까지 7년이다. 스몰츠가 어깨 부상에 시달리다 2000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7년간 세 투수가 선발로 쌓아 올린 승수는 도합 340승. 매덕스가 126승, 글래빈이 114승, 스몰츠가 100승을 각각 해냈다. 특히 매덕스는 7시즌 평균자책점 2.34를 기록하면서 같은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뛴 모든 투수를 통틀어 다승과 평균자책점, 투구 이닝(1626⅔이닝) 1위에 올랐다. 물론 글래빈과 스몰츠의 성적도 엄청났다. 글래빈은 7년간 1542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23의 성적을 올렸고, 스몰츠도 1434⅔이닝을 투구하면서 평균자책점 3.24를 남겼다. 내셔널리그 사이영상도 이들의 독무대였다. 7시즌 가운데 다섯 차례나 세 명이 상을 나눠 가졌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매덕스가 수상했고, 1996년엔 스몰츠, 1998년엔 글래빈이 각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매덕스는 시카고 컵스에서 뛰던 1992년까지 포함해 4년 연속 사이영상을 거머쥐는 위용을 뽐냈다. 다만 2000년부터 선발진에는 매덕스와 글래빈만 남았고, 2002년 18승을 올린 글래빈이 이듬해 뉴욕 메츠로 이적하면서 셋의 역사에 균열이 생겼다. 매덕스 역시 2003년 16승을 올린 뒤 2004년 친정팀인 시카고 컵스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 사람은 마침내 모두 다른 유니폼을 입게 됐다. 트로이카는 깨졌지만, 전설은 이어졌다. 매덕스는 23년간 개인 통산 355승을 올리고 5008⅓이닝을 던지면서 역대 최고의 제구력 투수로 인정받았다. 17시즌 연속 15승 이상(1988년부터 2004년까지)을 올리는 기염도 토했다. 셋 중 유일한 왼손 투수인 글래빈 역시 매덕스에 버금가는 305승을 쌓아 올리면서 사이영상을 두 차례 손에 넣었다. 스몰츠는 통산 213승 154세이브를 기록해 빅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200승-150세이브를 동시 달성한 투수로 남았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인 ‘명예의 전당’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매덕스와 글래빈이 2014년 입성했고, 스몰츠가 1년 뒤인 2015년 헌액됐다. 명예의 전당 입회를 결정짓는 투표에서 매덕스는 97.2%, 글래빈은 91.9%, 스몰츠는 82.7%라는 높은 지지율을 각각 얻었다. 그렇게 화려한 시절을 보낸 세 레전드에게도 애틀랜타에서 함께 뛴 7년은 선수 인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가장 오랫동안 애틀랜타를 지킨 스몰츠는 은퇴 당시 인터뷰에서 “그때와 같은 선발 트리오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셋은 서로의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함께 계속 성장해 나갔다”고 떠올렸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닷컴은 스몰츠가 마지막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뒤 각기 다른 지역에 있던 세 사람을 화상으로 연결해 ‘3자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트로이카가 명예의 전당에서 재회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