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퀄컴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 확대 후 개입 철회
업계에서는 이번 소송에서 삼성의 불참이 공정위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더욱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석방에 이의를 제기하는 민심이 여전한 상황에서 삼성이 정부에 등을 돌린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최근 삼성전자가 ‘세기의 대결’로 주목받는 공정위와 퀄컴 간 ‘1조 원대 과징금 행정소송’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방침을 밝히면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연합뉴스
공정위는 2016년 12월 퀄컴 인코포레이티드와 퀄컴 테크놀로지 인코포레이티드, 퀄컴 CDMA 테크놀로지 아시아퍼시픽 PTE LTD에 1조 300억 원의 ‘사상 최대 규모’ 과징금을 부과하고 휴대폰 제조사 요청이 있을 때 라이선스 계약을 재협상하도록 시정명령을 내렸다. 칩셋 특허권 시장에서 시장지배력을 남용해 휴대전화 제조사들에 부당 계약을 강요하는 ‘특허권 갑질’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에 따르면 퀄컴은 ▲칩셋 공급을 무기로 휴대폰 제조사에 불공정 계약 체결을 강요했고 ▲통신칩셋 경쟁사에 표준필수특허(SEP) 라이선스를 주지 않으며 ▲표준필수특허에 다른 특허를 끼워 팔고 거래 상대방 특허를 무상으로 사용했다. 또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스마트폰 가격의 5%에 달하는 과도한 수수료를 가져가는 폭리를 취했다. 퀄컴은 이에 반발해 지난해 2월 서울고법에 과징금 결정 취소 소송과 시정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시정명령 집행정지 신청은 지난해 11월 대법원에서 기각됐지만 과징금 결정 취소 소송은 ‘세기의 대결’로 진행 중이다.
공정위가 소송에서 승리할 경우 그 파급력은 대단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 안 그래도 세계 각국이 퀄컴에 제재를 가하기도 하고 분쟁을 겪는 상황에서 공정위와 퀄컴 간 소송의 결과는 충분히 선례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중국 당국도 비슷한 이유로 퀄컴에 과징금을 부과했고, 대만도 2017년 10월 퀄컴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1월 퀄컴에 과징금을 부과했으며,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퀄컴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제소했다.
세기의 대결로 불리는 만큼 공정위와 퀄컴의 법정공방은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 측은 법무법인 바른과 최승재 변호사 등 6인을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했으며 퀄컴은 법무법인 화우와 율촌, 세종 등 3개사를 선임했다. 비록 대리인 규모 면에서 공정위가 불리해 보이지만 삼성전자를 비롯해 글로벌기업인 애플, 인텔, 미디어텍, 화웨이 등이 공정위 측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공정위로서는 큰 힘이다. 보조 참가란 소송 결과에 대해 법률상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가 한쪽 당사자의 승소를 지원하기 위해 소송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삼성은 법무법인 광장을, 애플과 인텔은 각각 법무법인 태평양과 법무법인 지평을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삼성이 지난 2월 초 돌연 공정위에 퀄컴과 행정소송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삼성은 최근까지도 공정위 측 보조참가인으로서 퀄컴에 불리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터다. 삼성과 퀄컴은 지난 1월 말 양자간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확대 체결했으며, 2월 초 행정소송 개입 철회를 알렸다. 이후 2월 22일에는 삼성과 퀄컴이 5G 이동통신용 칩 생산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삼성 측 관계자는 삼성과 퀄컴이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갱신하며 자연스럽게 행정소송에서 빠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삼성 관계자는 “공정위가 퀄컴에 계약사들과 기존 계약을 재협상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삼성은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계약을 갱신하며 자연스럽게 보조참가인 자격에서 빠진 것”이라며 “(행정소송에서 삼성이 제외돼 불리해질 수 있다는 지적은) 법원에서 판단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소송의 무게추가 퀄컴 쪽으로 기울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업계에서는 추가 이탈 상황을 우려하기도 한다. 다른 기업도 아닌 우리나라 대표기업이 갑자기 소송에서 빠지면서 어려운 입장에 처한 공정위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일부에서 추가 이탈에 대한 우려를 보이는데, 보조참가인이 없는 소송이 대부분”이라며 “(삼성은) 필요했으니 보조참가인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필요 없으니 나간 것일 뿐 삼성 외 다른 기업들이 보조참가인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든든한 아군이자 증인이었던 삼성을 잃으며 과징금 소송에서 새 국면을 맞게 됐다. 이재용 부회장의 석방 이후 성난 민심이 채 가라앉지 않은 민감한 시기에 정부에 등을 돌린 삼성에 대해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고성준 기자
문제는 소송에서 공정위가 패할 때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률에 따르면 공정위는 이의신청의 재결 또는 법원 판결 등의 사유로 과징금을 환급하는 경우 과징금을 납부한 날부터 환급한 날까지 기간에 대해 환급가산금을 지급해야 한다. 공정위는 현재 별도의 과징금 환급 예산이 없는 상태다. 그동안의 과징금 징수액이 올해 결산 이후 모두 국고로 귀속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해 새로이 과징금 수입으로 환급 예산을 만들어야 한다.
퀄컴은 지난해 3월 말 이미 과징금을 완납한 상태다. 공정위가 소송에서 패한다면 퀄컴이 납부한 과징금을 돌려줘야 할 뿐 아니라 환급가산금까지 지급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삼성의 이탈은 공정위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커 보일 수밖에 없다. 공정위 한 관계자는 “소송이 진행 중이라 (삼성 이탈에 대해) 답변하기 어렵지만 삼성이 빠진다고 해서 불리한 점은 없다”며 “미리 패소를 생각해 환급액 대책을 강구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