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움 대명사였지만 저커버그 공개석상에 신고 나오며 유행…비버·베컴 등 셀럽 너도 나도 착용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삼선 슬리퍼라고 불리는 아디다스 슬리퍼의 정식 명칭은 ‘아딜렛(Adilette)’이다. 한때 백수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이 슬리퍼가 근래 들어 다시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표적인 ‘놈코어 스타일’로 여겨지면서 해외 가수, 배우, 모델 등 셀러브리티들이 앞다퉈 착용하는 핫한 액세서리가 된 것. 미국과 유럽에서 이런 ‘슬리퍼 패션’이 뜨기 시작한 것은 불과 4~5년 전이었다. 유명인사들이 아무렇지 않게 공개석상에서 삼선 슬리퍼를 신고 나오자 너나 할 것 없이 패션 아이템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명품 브랜드까지 합세해 각종 디자인의 슬리퍼를 출시했다. 최근 독일 시사주간 ‘포쿠스’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신발이 된 ‘아딜렛’의 진화 과정에 대해 다루면서 오랫동안 패션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악의 패션으로 간주됐던 ‘아딜렛’이 어떻게 가장 세련된 패션이 됐는지에 대해 보도했다.
한때 촌스러움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삼선 슬리퍼가 최근 핫한 패션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렇게 한때 촌스러움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삼선 슬리퍼가 오늘날 아디다스의 베스트셀러 제품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이제는 동네 골목길에서도, 시내 한복판에서도, 해변가에서도, 클럽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그야말로 핫한 아이템이 됐다.
삼선 슬리퍼, 즉 아딜렛이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난 1963년이었다. 아디다스 창립자인 아디 다슬러가 직접 디자인한 이 슬리퍼의 최초 용도는 독일 대표팀 축구 선수들의 안전과 위생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선수들은 라커룸과 샤워실에서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이를 위한 신발을 제작해줄 것을 다슬러에게 부탁했다. 탈의실 바닥이 미끄럽거나 혹은 더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독일에는 욕실용 슬리퍼란 것이 따로 없었다. 이런 요청을 받은 다슬러는 곧 디자이너팀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효율적인 신발 디자인에 대해 골몰했다.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선수들의 건강과 안전이었다. 공동 샤워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함과 동시에 무좀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편안한 디자인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오늘날의 아딜렛 디자인은 그야말로 간결하고 단순하다. 처음에는 운동 후 신는 샤워용 신발로 탄생했지만, 오늘날 평상시에 두루 사용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초의 디자인은 군청색 바탕에 스트랩 부분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 클래식한 스타일이었다. 깔창 부분은 인체의 발모양을 본떠 굴곡 있게 디자인됐으며, 밑창은 고무로, 그리고 발등을 덮는 두꺼운 스트랩은 인조 가죽으로 만들었다.
운동선수들을 위해 디자인된 삼선 슬리퍼가 처음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였다. 대학 캠퍼스, 기숙사 등에서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사주거나, 혹은 운동선수들이 훈련을 오갈 때 신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삼선 슬리퍼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비결에 대해 ‘포쿠스’는 ‘편안함’과 ‘내구성’을 꼽았다. 무엇보다도 발등 부분을 덮는 스트랩이 조리 샌들보다 넓기 때문에 신었을 때 편하고, 또한 스트랩의 양쪽 끝이 바닥에 접착되어 있어 잘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구성도 좋다는 것이다.
삼선 슬리퍼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단연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를 빼놓을 수 없다.
삼선 슬리퍼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단연 저커버그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그가 사석에서는 물론이거나와 공개석상에서 삼선 슬리퍼를 끌고 나타난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마치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안 쓴다는 듯한 그의 당당한 태도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신의 편한 스타일에 대해 지난 2012년 NBC와의 인터뷰에서 저커버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는 보시다시피 매일 같은 옷을 입습니다. 제 옷장을 보시면 아마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아실 거에요. 옷장 안에는 회색 티셔츠만 스무 벌 정도 있어요.”
실제 저커버그는 늘 같은 옷차림을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바지에 회색 티셔츠(혹은 후드티), 그리고 여기에 운동화나 삼선 슬리퍼를 신는 것이 바로 그만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저커버그는 지난 2011년 남성지 ‘GQ’로부터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옷 못 입는 남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실제 실리콘밸리에서의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저커버그는 예나 지금이나 늘 촌스런 스타일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한 파이낸셜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뉴스’를 통해 “저커버그의 패션은 ‘미성숙함의 표시’다”라고 악평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혹평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저커버그의 삼선 슬리퍼 패션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저커버그가 공개석상에서 삼선 슬리퍼를 신고 찍힌 사진이 한때 큰 화제가 되자, 얼마 후 실리콘밸리에서는 삼선 슬리퍼를 신고 출근하는 직원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2014년 들어서면서 이런 유행은 할리우드를 비롯해 명품패션 업계에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저스틴 비버, 리타 오라, 데이비드 베컴, 벨라 하디드 등 유명인들이 삼선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버버리, 프라다 등 화려하고 값비싼 명품 브랜드 의상에 삼선 슬리퍼를 매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령 메리 케이트 올슨은 고급 레스토랑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는가 하면, 리타 오라는 런던 시내를 슬리퍼를 신고 당당하게 돌아다니면서 시선을 끌기도 했다. 더 이상 슬리퍼를 신고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것은 결례가 아닌 듯 여겨졌다.
명품 브랜드들도 앞다퉈 슬리퍼를 출시하고 있다. 40만 원이 넘는 마크 제이콥스의 제품.
‘샤넬’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 트레이닝복 패션에 대해서 “트레이닝복을 입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비난했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도 슬리퍼 패션에 대해서만큼은 한발 양보했다. 다름이 아니라 금줄과 벨벳으로 장식된 값비싼 슬리퍼를 출시하면서 뒤늦게 슬리퍼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
하지만 명품 브랜드 슬리퍼의 문제는 비싼 가격에 있었다. ‘클로에’의 경우 삼선 슬리퍼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황금색 금속으로 장식한 슬리퍼를 840달러(약 95만 원)에 출시했는가 하면, ‘마크 제이콥스’ 슬리퍼의 경우에는 395달러(약 44만 원)였다. 아디다스의 삼선 슬리퍼가 보통 25~30달러(약 2만 8000~3만 원)란 점을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가격이었다.
패션 업계에 불고 있는 이런 슬리퍼 유행에 대해 ‘포쿠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다”라고 말했다. 슬리퍼가 점점 더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정서에 맞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몇 년 전부터 못생긴 것, 혹은 하층민 스타일을 재정의하는 트렌드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포쿠스’는 말했다. 다시 말해 ‘못생긴 것에서 황금을 캐라’는 성공 공식을 따르는 브랜드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포쿠스’는 대표적인 예로 요즘 가장 트렌디한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베트멍’을 꼽았다.
지난 2015년, ‘베트멍’은 파리패션위크에서 배송회사인 DHL과 협업한 티셔츠를 선보였다. 노랑색 바탕에 빨강색 로고가 새겨진 DHL 유니폼처럼 보이는 이 티셔츠는 245유로(약 32만 원)라는 다소 황당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블로거와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삼선 슬리퍼를 애용하는 셀럽들. 왼쪽부터 벨라 하디드, 저스틴 비버, 리타 오라.
이런 가운데 놈코어 스타일의 원조격인 아디다스는 현재 삼선 슬리퍼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두터운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다. 코르크나 퍼를 이용한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 그리고 타조가죽이나 조랑말 가죽 등을 이용한 프리미엄 버전 등을 출시하면서 꾸준히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또한 리타 오라, 라프 시몬스 등과 같은 셀럽들과의 협업을 통한 특별 모델의 경우에는 최고 170유로(약 22만 원)라는 다소 높은 가격에 판매하면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를 꾀하면서도 아디다스는 늘 한 가지를 잊지 않고 있다고 ‘포쿠스’는 말했다. 오래 전부터 삼선 슬리퍼를 즐겨 신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축구 선수들, 그리고 축구팬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에 아디다스는 늘 월드컵 시즌이 되면 각국의 국기 색상을 모티브로 한 버전들을 출시하고 있다. 월드컵 모델의 경우, 가격도 35유로(약 4만 원) 선으로 적당한 편이다. 이에 대해 ‘포쿠스’는 아디다스가 패션업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규칙을 터득한 것 같다고 말했다. 블로거들의 일시적인 야단법석에 휘말려서 오래된 충성스런 팬들을 쫓아내선 안 된다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아디다스 측은 삼선 슬리퍼의 매출액이 얼마인지, 그리고 판매량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삼선 슬리퍼에 대한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라는 점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