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 언어 달라 비밀유지에 유리…외국 출생 자녀들과 소통 위한 경우도
5월 2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첫 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은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불법으로 고용하고 서류를 조작해 체류를 연장시키는 등의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이 고용한 필리핀 가사도우미는 2013년부터 올해 초까지 6명이다. 이 가운데 5명은 대한항공 연수생 신분으로 입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재판에서 이 씨는 “주말까지 일할 수 있는 가사도우미를 구해달라고 대한항공 비서실 직원에 부탁만 했을 뿐, 가사도우미를 부정한 방법으로 입국시킨 사실은 최근에 알았다”며 “이 부분을 지시하거나 총괄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과거에 가사도우미를 쓰면서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치는 필리핀 도우미가 유행한 적이 있는 점을 참작해 달라”고 선처를 구했다.
재판에 참석하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 전 부사장도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서른 아홉의 늦은 나이에 쌍둥이를 출산해 회사업무와 육아를 병행하다보니 편의를 도모하고자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게 됐다”면서 “한국인 도우미는 주말에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국인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 생각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절차나 규정, 룰에 대한 생각을 못했다. 법 위반에 대해 적극적인 인식이 없었다는 사정을 참작해 달라”며 벌금형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가사도우미 소개 업체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A 씨에 따르면 재벌가에서 외국인 도우미가 인기를 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과거에는 외국인에 대한 불신이 컸던 까닭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평창동과 한남동 등 부촌을 중심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찾는 일이 늘었다고 한다.
집안에 사람이 드나들면 자연스레 사생활에 대한 뒷말도 나오기 마련. 이들이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비밀 유지다. A 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가사도우미들은 고용 전 비밀유지계약서를 쓴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어떤 것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최근 터진 재벌 갑질 폭로 사태로 비밀유지계약서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사모님들이 아예 언어가 다른 외국인을 채용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A 씨는 “부잣집 사모님들은 집안 얘기가 밖으로 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인 도우미들은 이미 자기들끼리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한국인 도우미를 쓰면 여기저기 말이 새어나올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다. 그래서 최근엔 아예 한국말을 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찾는 집이 꽤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향은 재벌 1, 2세보다는 재벌 3, 4세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과거에 비해 SNS나 언론 등 폭로 창구가 늘어난 까닭이다. 가사도우미 구인도 업체를 통하기보다는 기존 도우미의 소개나 추천을 통해 구하는 일이 잦다고 했다. A 씨는 “한진 모녀 사건을 계기로 재벌가는 보안 유지에 더욱 힘쓰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오롯이 언어를 이유로 외국인 도우미를 쓰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이 영어나 일어 등 외국어를 더 자유롭게 쓰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KBS가 지난 2014년 국내 10대 재벌일가 가운데 628명의 출생지를 확인한 결과 미국 출생자만 120명에 달했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재벌가 미성년자의 30% 이상은 외국 출생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겐 한국어보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한 셈이다. 그렇다보니 함께 사는 입주 가사도우미도 편의상 외국인으로 구한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 공개돼 물의를 빚은 조 전 부사장의 이른바 ‘고성 동영상’에도 이 같은 상황이 잘 나와있다. 조 전 부사장은 남편과 한국어로 다투다가 옆에 서 있는 아들에게 영어로 “내가 저녁 먹기 전에 다른 거 먹지 말랬지?”라며 꾸짖는다. 조 전 부사장의 쌍둥이 자녀는 미국 하와이 출생으로 한국어 사용이 서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계자 전언에 따르면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B 그룹과 대기업 C 그룹 계열사 사장도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적이 있다. B 그룹 일가의 경우 가족 구성원이 한국어보다는 외국어를 주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2개의 국가에서 각 2명씩 총 4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C 그룹 계열사 사장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출신 여성을 고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에서 태어난 자녀를 위해 가사도우미와는 별도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육아도우미를 채용한 것이다. 2명의 육아도우미는 이 집안 자녀가 외국 유학을 떠나면서 함께 일을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일하는 외국인 육아도우미의 연봉은 최소 2500만 원 이상이다. 입주 가사 도우미의 경우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