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에 속아 사표” 지연손해금 배상 판결…블랙리스트 문제 놓고 갈등 ‘눈엣가시 찍어내기’ 뒷말도
# 법원 “변창흠 전 사장, 블랙리스트 파동 때 허위진술로 전 간부 사직서 받아”
2017년 10월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SH공사의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이 제기됐다. 변창흠 당시 SH 사장과 그 측근이 공사 직원들의 정치성향,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친분관계 등을 조사했다는 것이었다. 이 문건을 공개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 위해 작성된 블랙리스트가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제가 된 SH 내부 문건 김성태의원실 제공.
‘SH공사 인사조직책임자(기획경영처장) POOL’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직위와 직급, 이름, 경력 등과 함께 해당 직원이 사내에서 누구와 친한지 친분관계까지도 적혀 있었다. 가장 마지막 ‘진보개혁’, ‘박 시장’ 항목은 지지여부에 따라 ○, △, Ⅹ 표시가 돼 있었다. 사내 동향은 물론이고 개인의 정치 성향까지 파악한 것이었다. 조사 대상자는 SH공사 1, 2급 주요 간부였다.
문건 공개 후 사건은 내부 갈등으로 번졌다.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노사 갈등이 더욱 심화된 것. 결국 변 전 사장은 2017년 11월 9일 자진 사퇴했다. 애초 박원순 시장의 3선 도전과 함께 연임이 유력했던 시기였다. 퇴임 사유는 연임 기준 점수 미달로 알려졌으나 블랙리스트 사건이 변 전 사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추측이 서울시 안팎으로 돌았다.
당시 임원급 간부 7명도 변 전 사장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7명 가운데 1명의 사표만 최종 수리됐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 논란의 관계자로 지목된 이 아무개 씨였다. 이 씨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사표는 반려됐다. 결국 이 씨는 자신의 퇴사가 변 전 사장의 부당한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취지의 소송을 냈다.
판결문을 보면 변 전 사장은 2017년 11월 6일 오후 1시쯤 이사직 임원 6명과 감사 1명을 사장실로 불러 “오전에 서울시 부시장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시 부시장이 최근 블랙리스트 의혹에 관한 언론 보도와 국정감사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경영진들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한 뒤 준비해둔 사직서를 꺼내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울시 부시장의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이 씨가 11월 8일 변 전 사장에게 ‘사직서 제출을 철회한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이 씨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이 씨가 사직서를 제출한 이유는 변 전 사장의 허위 진술로 인해 서울시로부터 사직서 제출 요구 지시가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며 “이에 대한 손해지연금 4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SH 공사는 4월 29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SH 측은 4월 30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1심 판사들이 한 쪽 입장만 들은 부분이 있다”며 “구체적인 사실관계, 법률관계 등을 변호인과 상의해 항소이유서를 작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씨의 퇴사와 관련해 SH 공사는 “이 씨는 변 전 사장과 함께 경영상 공동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망이나 착오를 유발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 ‘특정 인사 찍어 내리기’ VS ‘차기 사장직 두고 내부 갈등’
SH공사가 항소를 결정함에 따라 블랙리스트의 논란은 재점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 이 씨의 사직서 수리가 블랙리스트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나오는 까닭이다. 관계자 전언에 따르면 이 씨는 국정감사 직후 블랙리스트 문제를 놓고 변 전 사장과 갈등을 빚었다.
SH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당시 이 씨가 공사 출신으로 차기 사장으로 거론되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이 씨를 따르는 사내 직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그런데 변 사장의 연임이 유력해지면서 차기 사장으로 이 씨를 지지하는 이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런 당시 SH 사내 분위기에서 각종 음해성 루머가 불거지기도 했고 결국 블랙리스트 파문까지 불거졌다는 것. 게다가 문제의 블랙리스트에는 이 씨의 이름도 올라가 있었다. 이에 대해 SH 관계자는 “블랙리스트 파문 등이 불거져 시끄러운 당시 사내 분위기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결국 변 사장과 이 씨가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SH 내부 관계자 A 씨는 “SH 공사 사장은 서울시장이 임명하는 자리다. 만약 이 씨가 사장이 되려고 했다면 굳이 블랙리스트를 문제 삼아 서울시에 밉보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문건이 있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고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 노조위원장이 박원순 서울시장과 변창흠 전 사장에게 항의하기도 했으나 잘 처리되지 않았다. 당시 임원이었던 이 씨도 이런 민원을 해결하려다 윗선에 찍힌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변 전 사장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특정 인사를 찍어낸 것이라는 뜻이었다.
‘블랙리스트가 정말 존재했냐’는 질문에 대해서 SH 홍보실장은 “그런 문건이 돌아다닌 것은 맞다”고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변 전 사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작성했는지는 몰라도 회사나 사장의 지시 하에 작성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반면 A 씨는 “해당 문건은 2014년 변 전 사장이 SH 사장으로 내정된 후 변 사장과 내외부 측근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진도 2014년에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를 토대로 인사상 불이익이 있었느냐를 두고도 입장이 갈렸다. 당시 의혹을 제기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Ⅹ를 받은 직원들이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보직해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장은 “인사상 불이익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에 등장하는 1, 2급 직원들 15명 가운데 2019년 현재 회사에 남은 이들은 취재 결과 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에서도 본부에 남은 이는 사장직무대행을 한 신 아무개 본부장뿐이었다. 나머지 5명은 계약직 신분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SH 홍보실은 “오해다. SH를 떠나 출자회사 임원으로 가신 분도 계시고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도 계신다. 인사상 불이익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해명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