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ML 도전 꿈꾸는 박종훈 “동료였던 켈리 경기 챙겨본다… 무조건 ML 도전하고파”
SK 와이번스 언더핸드 선발투수 박종훈. 사진=이동섭 기자
[일요신문] ‘연안부두 잠수함’은 SK 와이번스의 비대칭 전력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극단적 언더핸드 선발투수’는 SK 마운드에 특별함을 더한다.
2017시즌 12승, 2018시즌 14승을 올리며 완성형 선발투수로 거듭나고 있는 박종훈. 올 시즌에도 박종훈의 활약은 인상적이다. 5월 8일 기준 박종훈은 8차례 선발 등판에서 46.2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 2.70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보다 훨씬 좋은 세부지표를 보이는 박종훈이지만, 올 시즌엔 유독 승운이 따르지 않는다.
시즌이 개막한 뒤 박종훈이 마수걸이 승리를 올리기까지는 꼬박 45일이 걸렸다. 5월 7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펼쳐진 SK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 선발 등판한 박종훈은 7이닝 2실점 호투를 펼치며 첫승을 거뒀다. 8번째 등판에서 이뤄낸 승리. 그야말로 7전8기였다.
박종훈은 “승리 투수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며 덤덤한 소감을 밝혔다. 그렇다면, 박종훈은 승리 투수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세 가지였다. “팀을 향한 헌신, 꿈, 그리고 팬”이었다.
5월 8일 ‘일요신문’이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박종훈을 만났다. 박종훈은 잠수함 투수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마수걸이 승리 (feat. 독수리 사냥꾼)
5월 7일 인천 한화전에서 7전8기 끝에 마수걸이 승리를 올린 박종훈. 사진=연합뉴스
잠수함이라고 다 같은 잠수함이 아니다. 박종훈은 ‘지대공 잠수함’으로 분류된다. 독수리 군단만 만나면 펄펄 나는 까닭이다. 박종훈은 프로 통산 14차례 한화를 상대하며, 8승 3패 평균자책 3.33을 기록했다.
한화 이글스 입장에서 박종훈은 그야말로 ‘천적’이다. 박종훈의 마수걸이 승리 역시 한화전에서 나왔다. 올해도 박종훈은 한화 상대 강세를 예고했다.
- 5월 7일 한화전에서 올 시즌 마수걸이 승리를 올렸다. 올 시즌에도 한화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상대팀이 누구냐’를 떠나서 7일 등판에서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기지 못하면, 올 시즌이 1승으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웃음).”
- 한화 상대로 통산 8승 3패 평균자책 3.33으로 강세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 “내가 특정 팀을 상대로 강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란 불확실한 감정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화 상대 등판할 때 더 집중하는 편이다. 염경엽 감독님이 ‘연승 중엔 신경을 더 쓰고, 연패 중엔 부담감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공감되는 말이었다. 나 역시 상대 전적이 좋은 팀을 상대로 공을 던질 땐 더욱 신경 써서 경기에 임하려고 한다. 그 결과 시즌 첫승이란 열매를 수확했다. 기분이 좋다.”
- 지난해까지 박종훈 하면 ‘승운이 따르는 투수’란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 상황은 정반대다. 기록이 상당히 좋은데, 승운이 따르지 않는 듯하다.
“승운에도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지난해와 올해를 비교하면, 나와 (김)광현이 형의 흐름이 뒤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시즌엔 나에게 승운이 따랐고, 광현이 형은 불운했다. 올해엔 정말 정반대다(웃음). 하지만 승리투수가 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내 목표는 따로 있다. 바로 170이닝을 소화하면서, 평균자책 3점대를 유지하는 것이다.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도 15번 이상 하고 싶다.”
- 지난해까지 ‘5급 공무원’이란 별명이 있었다. 안정감 있는 투구로 정확히 5이닝만 소화한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지금 밝힌 목표대로라면, 올해는 ‘6급·7급 공무원’이란 별명을 노리는 것인가.
“그렇다. 공무원 세계에선 5급 공무원이 더 좋겠지만, 선발투수 입장에선 6급 혹은 7급 공무원이란 별명이 더 명예로울 것 같다. 팬들이 나를 ‘6급·7급 공무원’이라 부르는 걸 상상만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올 시즌 박종훈은 8경기에 등판해 46.1이닝을 소화했다. 177이닝 페이스다. 박종훈의 이닝 소화 능력이 좋아진 배경엔 ‘볼넷의 감소’가 있다. 2016년 박종훈의 ‘볼넷/탈삼진 비율(볼삼비)’은 0.88(91볼넷, 104탈삼진)이었다. 올해 박종훈의 볼삼비는 0.42(14볼넷, 33탈삼진)이다. 박종훈의 제구가 눈에 띄게 진화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수치를 확인한 박종훈은 “정말 많이 좋아졌다”며 스스로 감탄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나는 제구에 약점이 있는 투수였다. 항상 컨트롤에 신경을 쓴다. 시간이 흐를수록 좀 더 나은 제구를 갖춘 투수로 진화하고 싶다. 그러다보면, (김)광현이 형 같은 좋은 투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 메이저리그
멀지 않은 미래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는 박종훈. 박종훈은 “메이저리그 경기장에서 힐만 감독을 만나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마수걸이 첫승을 거둔 이튿날인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박종훈은 기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딸 시은 양을 바라봤다. 박종훈은 시은 양에게 “오늘은 어버이날인데, 이날엔 ‘아빠 사랑해요’라고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시은 양은 “싫어”라는 단호한 대답을 남긴 채 유치원에 등원했다.
시은 양이 유치원에 등원하는 뒷모습을 바라본 박종훈은 이내 TV를 켰다. LA 다저스 류현진 선발 등판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딸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서운함은 금새 잊혀졌다. 박종훈은 메이저리그 경기 시청에 푹 빠졌다. 그리고 이날 박종훈이 시청한 경기에서 류현진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뒀다.
- 5월 8일 류현진의 무사사구 완봉승 경기를 시청했나.
“봤다. 정말 대단하더라. 류현진 등판 경기가 끝난 뒤 SK 손혁 투수코치님께 연락이 왔다. 손 코치님이 ‘류현진 93구 완봉승 했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답했다(웃음). 그러니 손 코치님이 ‘아니야, 아니야, 잘하고 있어’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진담반 농담반으로 ‘죄송했다’고 답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도 적은 투구수로 많은 이닝을 소화해 팀에 더 공헌하고 싶다. 류현진 선배의 투구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 평소에도 메이저리그 경기를 자주 챙겨보나.
“지난 시즌까지 팀 동료로 함께 했던 메릴 켈리(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선발 등판 경기는 꼭 챙겨본다. 류현진 선발 등판 경기 역시 틈틈이 본다. 그러면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스스로를 대입해보기도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KBO리그에서 수준급 투수로 인정받은 뒤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면 보기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조건 빅리그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한 언더핸드 투수가 공을 던지는 장면을 봤다. 속구 구속이 133km/h정도 되더라. 그걸 보고, ‘나도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실제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박종훈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들어봤다. 감사한 일이다. 지금 내게 성공과 실패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선수 시절에 야구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다. ‘야구 종주국’ 미국에서 야구를 해보고 싶은 이유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훗날 좋은 지도자로 거듭나고 싶다. 내가 꿈꾸는 미래다.”
- 혹시라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트레이 힐만 전 감독을 조우할 가능성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렇지 않을까. 힐만 전 감독님을 만나면 눈물이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힐만 감독님은 나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자, 내게 처음으로 ‘우승’을 안겨준 은사인 까닭이다. 물론 우리 SK 선수단 역시 힐만 감독님께 우승을 선물했다(웃음).”
빅리그 도전을 꿈꾸는 박종훈의 말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미국 야구계 역시 박종훈의 ‘특별함’을 주목하고 있는 까닭이다. 4월 5일 미국을 대표하는 세이버매트릭스 미디어 ‘팬그래프닷컴’은 박종훈을 소개하는 장문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미국 야구계 정보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박종훈을 유의 깊게 지켜보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몇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 연쇄사인마
언제 어디서든 팬들을 향한 사인을 멈추지 않는 ‘연쇄사인마’ 박종훈. 사진=이동섭 기자
KBO리그에서 팬서비스가 좋은 선수를 꼽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박종훈이다. 박종훈은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는 자신을 모르는 팬에게 자발적으로 사인을 해주기도 하다. 박종훈에게 ‘연쇄사인마’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박종훈이 어린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을 때였다. 그 장면을 멀뚱히 지켜보는 한 어린이가 박종훈 눈에 띄었다. 박종훈은 그 어린이에게 다가가 “아저씨가 누군지 알아?”라고 물었다. 어린이는 “몰라요”라고 답했다. 박종훈은 환하게 웃으며 “아저씨는 SK 선발투수 박종훈이야”라고 말하며 어린이가 쥐고 있는 공에 사인을 해줬다. 왜 박종훈이 ‘연쇄사인마’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올해도 ‘연쇄사인마’라는 별명은 유효한 것인가.
“글쎄… ‘연쇄사인마’라는 별명을 지키려 팬서비스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팬들에게 사인을 해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별명으로 불리는지는 전혀 상관없다. 그저 나를 찾아주시는 고마운 팬들께 계속 사인을 해드릴 계획이다.”
- 팬을 사랑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다소 늦은 시점에 ‘마수걸이 승리’를 수확했는데, 팬들에게 승리 소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첫 승을 따내는 과정에서 팬 여러분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컸다. 첫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한목소리로 ‘다음 경기엔 무조건 승리 할 거에요’라고 힘을 북돋워주셨다. ‘미리 주는 1승 선물’이라며 경기마다 꽃다발을 주시는 팬도 있었다. 내 첫 승을 한마음으로 염원해주는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그 사랑에 보답하려면 팬서비스 더 열심히 해야 한다(웃음). 그리고 부상없이 꾸준한 활약을 펼쳐 SK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박종훈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종훈이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 바로 ‘사인회 행사’였다.
야구선수 박종훈을 지탱하는 두 가지 힘이 있다. 첫 번째는 팬이고, 두 번째는 꿈이다. 자신의 꿈, 그리고 그 꿈을 응원하는 팬들이 있기에 ‘연안부두 잠수함’ 박종훈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