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고초 겪을 때마다 “더 강한 투쟁 하시라” 독려…“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성평등 연 1세대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 고성준 기자
이 여사는 대통령 DJ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 이전에 한국 여성 운동사를 새로 쓴 ‘1세대 페미니스트’였다. “유복한 환경이 빚”이라며 탈기득권을 몸소 실천했다. 일제 치하인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이화여고·이화여전·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미국 램버스대와 스카렛대를 졸업했다. 파격적인 신여성이었던 셈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모임에서 여학생들이 고개를 숙인 채 맥주를 마시자, 이 여사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마셔라”라고 말한 일화는 지금껏 회자한다. 해방 전 남녀칠세부동석이 일반화된 시절에도 생활 곳곳에서 여성인권 신장 운동을 전개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 여사 별세 직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으로 안온하고 자족적 삶을 누리는 것을 접고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길을 택했다”며 경의를 표했다.
실제 그랬다. 이 여사의 부친 이용기(한국 의사 면허 4호)는 남원도립병원장, 포천도립병원장을 지냈다. 모친 이순이는 한의사 집안의 딸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도 여성차별에 반기를 들며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고인은 한국전쟁 당시 이태영 박사 등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1950년)과 여성문제연구원(1952년) 등을 창설했다. 이 박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다. 헌정사상 최초의 야당 당수였던 박순천도 고인의 여성운동 동지였다.
당시 해운회사 사장이었던 DJ를 처음 만난 것도 이쯤이다. 대한여자청년단 간부였던 이 여사는 서울 소재 대학생 모임인 ‘면학동지회’ 회원들과 부산에서 시국 토론을 벌였다. DJ도 함께했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 여사는 4년간 사회학을 전공하고 귀국, 이화여대 강사를 시작으로 여성문제연구원 간사와 기독교여성청년회(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여성 운동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었다.
수송당의 발자국은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 현장마다 깊게 배었다. 고인의 첫 번째 여성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축첩(첩을 둠)이 만연했던 당시에는 첩으로 들어온 여자와 본처가 갈등을 빚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여사는 당시 ‘첩을 둔 남자는 국회에 보내지 말자’, ‘아내를 밟는 자 나라 밟는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집회를 열기도 했다. 고인의 외침이 일부일처제의 시초였다.
1968년에는 ‘직업여성세미나’ 등을 통해 여성 직장인 차별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 여사는 “남녀 임금 차이, 결혼 즉시 퇴직 등 불합리한 차별적인 대우가 여전히 여성에게 가해지고 있다”며 “최소한 노동법상 규정된 보호 조항이라도 지켜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인의 운동은 1989년 모계·부계 혈족을 8촌까지 인정하는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 법을 국회에서 주도한 이는 DJ였다. 이를 계기로 ‘아내의 권리와 남편의 권리’, ‘딸의 권리와 아들의 권리’가 동일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이는 11년 뒤 여성 운동사의 역사적인 사건인 ‘호주제 폐지’로 이어졌다.
DJ도 생전 “내가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한 것은 아내의 조언 덕”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1997년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국민의정부는 여성부(현 여성가족부)를 창설했다. 여성부를 비롯해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환경부, 보건복지부 등을 여성 장관으로 채웠다. 남녀차별금지법을 시행한 것도 국민의정부 때였다.
여성단체 인사들이 고인을 ‘성평등을 연 1세대’로 치켜세우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6월 11일 고인 빈소인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선 이성림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은 ‘여성문제연구회 50년사’ 책을 가슴에 품고 애도했다. 이 책에는 1952년 이 여사가 여성문제연구원(현 여성문제연구회) 회원들과 투쟁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독신 여성 운동가의 길을 걷던 이 여사는 1962년 DJ와 운명적인 결혼 이후 민주화 투사로 거듭났다. ‘DJ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이자 ‘재야의 정신적 지주’였다. 영원한 동교동계(DJ의 가신그룹) 안방주인이기도 했다. 70대 후반의 고령에 청와대로 들어간 고인은 운동하는 퍼스트레이디의 모델을 정립한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었다. 100년간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사회 혁명가였다.
이 여사는 훗날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고자 선택한 결혼”이라며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DJ는 이 여사와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1971년 자신의 정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95만 표 차로 석패한 직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1972년 미국 망명길에 오른 DJ는 이듬해 납치사건을 시작으로,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1980년), 가택연금(1982∼1987년) 등 박정희 군부독재와 전두환 신군부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DJ가 고초를 겪을 때마다 고인은 “더 강한 투쟁을 하세요”라고 독려했다. 1971년 대선 당시 찬조연설에 나선 이 여사는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며 투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듬해 미국에서 박정희 유신 반대운동을 하던 DJ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에서는 당신이 외국에서 성명 내는 것과 국제적 여론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한다”며 “특히 미워하는 대상이 당신이므로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말했다.
DJ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자, 고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당히 일하다가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며 “우리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기를 내뱉었다.
이 여사는 1977년 징역 5년을 확정받고 진주교도소로 이감된 DJ에게 편지를 보내 “하루를 살더라도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겠습니까”라고 전했다. DJ는 신군부가 자행한 내란음모 사건으로 1980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여사는 그때에도 편지를 통해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며 “당신은 언제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강했다. 그래서 받은 것이 고난의 상”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고인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등 DJ 석방을 위한 국제적인 구명 운동을 펼쳤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며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고 전했다.
DJ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1987년 한국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6·10 민주항쟁은 DJ의 족쇄를 풀었다. 그러나 DJ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1987년과 1992년 13대와 14대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한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DJ는 약속 번복 논란 속에서도 1995년 6월 첫 민선 제1기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계 복귀에 시동을 걸었다. 수송당은 당시에도 DJ의 정계 복귀를 격려했다. 1996년 총선 직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외환위기 속에서 치른 이듬해 대선에서는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4수 끝에 꿈을 이뤘다.
고인의 역할은 단순한 퍼스트레이디에 그치지 않았다. 1세대 페미니스트답게 여성 인권에 힘썼다. 1997년 외환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결식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했다. 이 여사는 즉각 봉사단체인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재단’을 각각 추진했다. 이 여사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두 단체의 고문직을 맡았다. 고인이 여성 인권 운동에 매진하며 주가를 올리는 사이, DJ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등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당시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재직 중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삼남 홍걸 씨와 차남 홍업 씨가 비리 등에 연루, 잇따라 구속됐다. 야당과 언론 등에서는 “홍삼 트리오”라고 비판했다.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DJ가 레임덕(권력누수)의 길을 걸은 것도 측근 발 권력형 비리 때문이었다. 이 여사는 “내가 죄인”이라며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악몽의 순간이었다”고 통탄했다.
퇴임 직후에는 민주정부 2기인 참여정부에서 대북송금특검을 단행, 최대 위기를 맞았다. DJ의 분신과도 같았던 햇볕정책과 남북 정상회담 등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DJ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졌다. 이 여사는 DJ가 서거한 2009년 8월까지 혈액 투석을 도우며 곁을 지켰다. 반평생 가까운 47년간 DJ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로 함께했다.
이 여사는 DJ 서거 당시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다”며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 권력의 회유와 압력도 있었으나 한 번도 굴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며 “이것이 남편의 유지”라고 밝혔다.
DJ는 생을 마감했지만, 이 여사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2011년 12월과 2015년 7월 각각 방북했다. DJ 재임까지 포함하면 총 세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다. 퇴임 이후 이 여사의 활동은 남북평화에 집중됐다. 고인은 마지막 방북 때 기자회견을 통해 “평양에서 애육원, 육아원을 방문하고 해맑은 어린이들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세대에 분단의 아픔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새기게 됐다”며 “6·15가 선포한 화해와 협력, 사랑에 선언과 평화와 하나 됨의 역사를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영면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