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구 반발력 조정’ 이후 홈런 감소세 뚜렷, 투수의 탈삼진-볼넷 수치엔 큰 변동 없어… “리그 흥미 떨어졌다” 우려도
2017시즌 21홈런, 2018시즌 23홈런을 터뜨린 KIA 타이거즈 안치홍. 2019시즌(6월 18일 기준) 안치홍은 3홈런에 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2010년대 중반 KBO 리그엔 유례없는 홈런 광풍이 불었다. 그야말로 홈런의 시대였다. 그런데 2019년 KBO 리그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 볼 수 없다. 홈런의 시대가 종말을 맞고 있는 상황이다.
‘홈런의 시대’ 발단은 2014년이었다. 9개 구단 체제로 운영되던 2014년, KBO 리그는 ‘외국인 타자 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투고타저 성향을 띠던 KBO 리그엔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에릭 테임즈와 야마이코 나바로, 브렛 필 등 외국인 타자는 투고타저 일변도였던 KBO 리그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변화한 타격 트렌드 역시 ‘홈런의 시대’ 도래에 일조했다. 2010년대 들어 KBO 리그엔 ‘어퍼스윙’을 선호하는 타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윙 궤적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식의 타격 메커니즘이다. 어퍼스윙은 안타와 타율보다 장타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 야구에서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어퍼스윙은 공을 맞히는 것에 초점을 두는 스윙이 아니다. 어퍼스윙은 장타 생산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다. 결국 타격 기술의 대세가 변하면서, KBO리그는 힘 있는 타구가 빈번하게 나오는 리그로 탈바꿈했다.
‘홈런의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배경은 공인구 반발력이었다. 2018시즌까지 KBO 리그 공인구 반발계수는 일본 프로야구와 국제대회 공인구 반발계수(0.4034 이상 0.4234 이하)를 상회했다. 당시 KBO 리그 공인구 반발계수는 0.4134 이상 0.4374 이하였다. 미세한 차이로 보일 수 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2010년대 KBO리그 홈런 및 장타율 기록. 2019년 6월 18일 기준. 자료=스탯티즈
2014년 KBO 리그에선 총 1162홈런이 나왔다. KBO 리그가 10개 구단 체제로 개편된 2015년엔 홈런 증가폭이 더 컸다. 무려 1511개 공이 담장 밖으로 넘어갔다. 2016년 1483 홈런, 2017년엔 1547 홈런이 터졌다. 2017년 SK 와이번스는 팀홈런 234개를 기록하며, KBO 리그 단일팀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2012년 615홈런, 2013년 798홈런이 터진 것을 고려하면, 상전벽해 수준의 변화였다.
2018년은 홈런의 시대 클라이맥스였다. 총 1756개 타구가 홈런으로 연결됐다. 1982년 KBO 리그 출범 이후 가장 많은 홈런이 나온 것. 결국 KBO는 공인구 반발계수 조정을 전격 결정했다. KBO는 공인구 반발계수를 일본 프로야구 수준(0.4034 이상 0.4234 이하)으로 맞췄다. 통상적으로 반발계수를 0.001 낮출 경우 비거리가 20cm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인구 반발력이 떨어지자, KBO 리그 타자들의 홈런 기록은 즉각 반응했다. 6월 18일 기준 KBO 리그가 반환점을 코앞에 둔 가운데, 시즌 홈런 개수는 506개에 불과하다. 이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정규리그가 종료될 때쯤 KBO 리그 홈런 개수는 1000개를 조금 넘길 것으로 보인다.
타자들의 홈런 페이스가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투수들의 평균자책은 낮아졌다. 지난해 5.20이었던 KBO 리그 평균자책은 올 시즌(18일 기준) 4.25로 눈에 띄게 낮아졌다.
6월 18일 기준 LG 트윈스 외국인 투수 타일러 윌슨은 평균자책 1.70을 기록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시즌 중반 1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도 세 명이나 된다. 6월 18일 기준 1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한 투수는 타일러 윌슨(LG 트윈스, 1.70), 앙헬 산체스(SK 와이번스, 1.87), 드류 루친스키(NC 다이노스, 1.88)다. 모두 외국인 투수다.
2010시즌 류현진 이후 KBO 리그엔 정규이닝을 소화한 1점대 평균자책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올 시즌 외국인 투수들의 선전은 ‘9년만의 1점대 평균자책 투수’ 등장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공인구 반발계수 조정 이후 KBO 리그의 극심한 타고투저 현상은 다소 진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장에선 여전히 “쓸 만한 투수가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새어 나온다. 세부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현장의 목소리를 이해할 만하다.
올 시즌을 절반 가까이 치른 6월 18일, KBO리그 투수들은 2479 볼넷을 허용했고, 4922 탈삼진을 기록했다. 지난해 시즌을 통틀어 4622 볼넷과 10688 탈삼진이 나온 것을 고려하면, 페이스엔 큰 차이가 없다. 볼넷 페이스는 오히려 증가한 모양새다.
결국, 선수들의 기량과 상관없이 외부적인 요소가 기록에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야구계 일각에선 “KBO리그 흥행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활약 중인 류현진. 2010년 한화 이글스 류현진 이후 KBO리그에 1점대 평균자책 투수는 자취를 감췄다. 사진=연합뉴스
한 야구계 관계자는 “공인구 반발력을 너무 많이 낮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면서 “타자들의 공격력이 떨어지니 리그 흥미 자체가 반감하는 느낌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개인적인 생각으론 KBO 리그 매력은 화끈한 공격력이었다. 그런데 그 매력이 줄어든 점은 분명 아쉬운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한 야구인은 “최근 희한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무안타 타자 일순’, ‘끝내기 낫아웃’ 등 희귀 기록은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직시하게 만든 현상이었다”고 꼬집었다. 이 야구인은 이어 “결국 야구 수준은 제자리걸음이다. 그런데 타자의 홈런이나 투수의 평균자책을 살펴보면, 기록의 흐름이 뚜렷하게 바뀌었다. 인위적인 요소가 리그 투·타 균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라면서 “이런 변화는 궁극적으로 리그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홈런의 시대’에 KBO 리그 대세는 화끈한 타격전이었다. 반면 투수들에겐 그야말로 ‘수난의 시대’였다. 하지만 올 시즌을 기점으로 리그 흐름은 급변하고 있다. 공인구 반발계수 조정이 선수들의 기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홈런의 시대’는 종말을 앞두고 있다.
타고투저 현상을 진정하려던 KBO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홈런의 시대’ 종말에도 그림자는 있다. 올 시즌 KBO 리그는 흥행몰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6월 18일 기준 KBO 리그 총 관중수는 395만 2857명이다. 이대로라면 ‘4년 연속 800만 관중 돌파’는 쉽지 않아 보인다.
KBO는 의도적으로 ‘홈런의 시대’에 제동을 걸었다. 동시에 KBO는 다른 과제를 떠안았다. 홈런의 빈자리를 채울 흥행요소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연 KBO가 ‘홈런의 시대’ 이후 어떤 흥행 청사진을 제시할지 야구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