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이번에 서장이 영상 유출…“이제 말 못해줘” 분위기 확산
최근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을 취재할 때마다 가장 먼저 나오는 반응이다. 피의자 관련 개인정보나 수사 관련 진행 상황을 확인해 달라는 질문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피의사실 흘리기라는 죄명으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울산지방검찰청이 울산지방경찰청의 사건 보도자료 배포를 ‘피의사실 공표’로 문제 삼은 뒤, 이슈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검찰청은 울산 경찰의 피의사실 공표 사건에 대해 ‘계속 수사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그러다보니 취재 일선은 물론, 경찰과 검찰 내부에서조차 ‘어디까지가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왈가왈부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고유정 체포 영상이 경찰 간부에 의해 언론에 유출되면서 이런 분위기가 한층 강화됐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나서 “국민이 공감하는 피의사실 공표 기준과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도 검찰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소하는 등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옥죄는 방법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대검찰청 ‘울산 경찰 계속 수사하라’ 결정
대검찰청 산하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7월 22일 회의를 열고 울산지검의 ‘경찰관 피의사실 공표 사건’ 수사를 계속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해당 사건은 지난 1월 울산지방경찰청이 약사 면허증을 위조해 약사 행세를 한 일반인 A 씨를 구속하면서 낸 보도자료가 발단이 됐다. 울산지검은 A 씨가 공인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경찰이 재판에 넘기기 전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며 이 보도자료를 배포한 울산경찰청 광역수사대장과 직속 팀장 등 2명을 지난 6월 입건했다. 그러자 경찰 측 변호인은 울산지검 산하 검찰시민위원회에 이 사건의 수사 여부를 안건으로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대검 산하 심의위원회는 ‘수사가 필요하다’는 결론과 함께 검찰 손을 들어줬다.
피의사실 공표는 형법 제126조에 명시돼 있는데, ‘검찰이나 경찰 등이 업무 과정에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기소 전에 외부에 누설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실제 처벌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피의사실 공표 문제로 접수된 347건 가운데 기소된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SBS가 공개한 고유정 긴급 체포 당시 영상.
# 고유정 사건 영상 유출까지 터진 경찰, 수습 나섰지만…
그런 가운데 최근 고유정 사건을 수사한 제주경찰 측의 행동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둔 경찰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부 언론에 고유정 긴급 체포 당시 영상을 제공했는데, 이 과정이 문제가 된 것.
7월 2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와 28일 ‘세계일보’는 고유정이 청주에서 긴급 체포됐을 당시의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서 경찰은 지난달 1일 고유정을 청주의 한 지하주차장에서 만난 뒤 “살인죄로 체포하겠습니다. 긴급체포 하겠습니다”라고 통보했고, 이에 고유정은 “왜요?”라고 항변한다. 경찰은 “변호사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 거부할 수 있다”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며 고유정을 체포했다. 공개된 장면에서 고유정은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한 듯 행동했지만, 실제로 경찰 호송차에 탔을 때는 전남편을 살해한 것을 인정하면서 경찰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고 말했다는 부연설명도 함께였다.
이 영상을 언론에 제공한 것은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제주동부경찰서장 박기남(현 제주지방경찰청 정보화장비 담당관). 하지만 체포영상의 언론사 제공은 경찰 내부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박기남 전 서장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박 전 서장은 “초동수사에 미흡했다는 지적에 해명하고자 영상을 제공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례적인 체포영상 언론 제공은 경찰청 수사공보 규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잇따랐고 결국 경찰은 박 전 서장을 상대로 진상 조사에 나섰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7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영상이) 적정한 수준에서 공개된 것인지, 절차상 부적절한 면은 없었는지 진상 파악을 하도록 하겠다”며 “진상이 파악되는 대로 부적절한 면이 있으면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청 관계자는 “현장 상황에 따라 만약 본인(박 전 서장)이 유출했으면 그 배경에 어떤 어려움 등이 있었을 것”이라며 “단순히 유출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 삼을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경찰이 또 ‘피의사실 공표(공보규칙 위반)’로 검찰의 수사 받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 내부 진상조사로 선(先)대응에 나섰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사실 국민의 알권리와 피의자의 인권은 서로 정반대되는 위치에 있고 어느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며 “피의사실 공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인 탓에 여태껏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인데 경찰이 검찰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부 조사 및 수사 종결로 마무리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7월 30일 국회 정론관에서 딸의 KT 부정채용 의혹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 검찰도 공세당하기는 마찬가지 “앞으로 더 빈번해질 것”
경찰의 피의사실 공표를 문제 삼으면서 이슈를 만든 검찰. 하지만 정작 검찰 스스로도 피의사실 공표에 발목이 잡혔다. 딸의 KT 부정채용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검찰 관계자들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소했다. 사건은 현재 경찰이 맡고 있는데, 경찰은 고소인(김성태 의원) 조사부터 시작하겠다는 방침이다.
서울남부지검은 7월 22일 KT가 김성태 의원 딸을 국회의원 직무와 관련해 부정 채용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김 의원을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공소장 등에서 김 의원의 딸은 당시 다른 계약직 직원들에 비해 급여도 높게 받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2011년 4월부터 KT 스포츠단에서 계약직으로 근무를 시작한 김 의원의 딸은 2012년 하반기 KT 공채에서 최종 합격해 정규직 직원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합격 배경으로 김성태 의원을 지목하고 뇌물혐의를 적용했다.
이에 반발한 김성태 의원은 ‘검찰이 위법하게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는 취지로 수사를 담당한 권익환 서울남부지검장 등 3명을 지난 22일 고소했고, 다음날인 23일에는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입구에서 검찰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김 의원과 지지자들은 ‘피의 사실 공표한 정치검사 즉각 수사하라’, ‘정두언을 죽인 살인 검사’, ‘부역검사 즉각 감찰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푯말로 검찰을 압박했다.
경찰은 사건을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담당하도록 했는데, ‘피의사실 공표 압박’이라는 수사기관 압박 카드가 하나 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 검찰 출신 법조인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유정 사건이나, 김성태 의원 사건 모두 사건의 잔혹성이나 공인인 김성태 의원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할 때 언론에 일부 내용을 공개해도 문제될 게 없는 사안인데 최근 피의자 인권과 함께 피의사실 공표가 논란이 되다보니 검찰과 경찰이 수사를 받을 처지에 놓인 것 같다”며 “앞으로는 수사기관이 조금만 실수를 해도 이를 노려 고소, 고발하는 피의자들이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