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 등장에 7000원대 혈액백 4000원대로 싸져…적십자 “관계법령을 준수, 담합 묵인 아냐”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은 2011년 11월부터 2018년 5월까지 6년 6개월 동안 3차례 진행된 ‘혈액백 공동 구매 단가 입찰’에서 가격을 담합해 발주 물량을 각각 7 대 3 비율로 나눠가졌다. 두 회사는 이 기간 동안 적십자에 1301만 6788개 혈액백을 약 909억 원에 공급했다.
발주처인 대한적십자사가 녹십자엠에스(MS)와 태창산업이 혈액백 입찰 과정에서 가격 담합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일요신문DB
혈액백은 헌혈된 혈액을 담는 저장용기다. 단일백, 이중백(320ml, 400ml), 삼중백(320ml, 400ml), 사중백으로 나뉜다. 적십자는 매년 입찰 공고를 내고 200만 개 분량의 혈액백을 구입한다. 국내 혈액백 시장은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이 독과점하고 있다. 전체 물량 가운데 70%를 녹십자엠에스가 가져가기 때문에 사실상 독점 시장이다.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 두 회사의 가격 담합으로 적십자는 상당한 손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담합이 끝난 직후 혈액백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기 매문이다.
적십자는 담합 기간 동안 매년 200만여 개 혈액백을 평균 140억 원에 구입해왔다. 2017년 3월엔 201만 556개 혈액백을 158억 3000만 원에 사기도 했다. 그런데 2018년 6월엔 혈액백 200만 7640개가 105억 3000만 원에 공급됐다. 글로벌 제약사인 프레지니우스카비코리아(카비)가 계약에 성공한 올해엔 혈액백 198만 4628개의 가격이 90억 1000만 원까지 떨어졌다. 단순 환산했을 때 평균 개당 7873원이던 혈액백이 4540원으로 3333원(42%)가량 인하된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갑자기 단가가 40% 이상 싸지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동안 녹십자가 혈액백 가격을 부풀려왔고, 발주처인 적십자는 이를 알고도 방조했다고 봐야 한다”며 “건강보험 예산 부당 취득에 적십자가 가담한 꼴이다. 그게 아니라 발주처인 적십자가 혈액백의 적정 단가를 몰랐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적십자가 두 회사의 담합으로 한 해 최대 68억 원, 6년 6개월 동안 총 325억 원가량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적십자는 막대한 손해를 보고도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의 다음 입찰을 막지 않을 예정이다.
적십자 내부엔 부정한 일을 저지른 기업의 재입찰을 막는 ‘부정당 기업 지정’ 제도가 있다. 하지만 적십자는 1심 법원 판결 효력을 갖는 공정위 판결만으론 두 업체를 부정당 기업으로 지정하기에 부족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적십자는 매년 200만여 개 혈액백을 평균 140억 원에 구입했다. 최고 158억 원까지 했던 혈액백 가격은 경쟁사가 등장한 이후 90억 원까지 낮아졌다. 출처=대한적십자
적십자 관계자는 “공정위 판결이 나왔지만 대법원 결정이 나기 전까진 혐의가 확정된 건 아니기 때문에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을 ‘부정당 기업’으로 등록할 계획은 아직 없다”며 “물론 두 기업이 아직 항소하진 않았다.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 업체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해왔고 대법원에서 뒤집히는 경우도 있어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적십자 관계자는 위 대답이 있고 5일 뒤인 지난 4일 “공정위가 보도자료는 냈지만 담합 결과를 아직 정식 통보하지는 않았다. 공정위 공식 통보 후 검토할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적십자가 가격 담합의 ‘몸통’이라서 범죄를 저지른 업체를 감싼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항소하지도 않은 업체의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적십자는 지난해 ‘입찰 서류 위조’ 혐의를 받는 면역장비업체를 부정당 기업으로 지정했다. 이 업체는 현재 항소를 진행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가 언급한 면역장비업체 부정당 기업 지정에 대해 적십자 관계자는 “해당 업체는 서류 위조 혐의가 명백히 사실로 확인됨에 따라 부정당업자 제재 행정처분한 사례”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된 가격 담합 개입 의혹에 대해 적십자는 “대한적십자사는 국가계약법 등 관계법령을 준수하여 입찰 및 계약을 추진하고 있으며, 입찰 참여업체들의 담합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적십자가 적정 단가를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적어도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의 투찰 가격이 해외 혈액백 가격과 비교해 현저히 높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8년 10월 국정감사쯤에 적십자로부터 제출받은 ‘혈액관리본부 혈액백 구매계약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적십자 혈액구매팀은 2012년 12월부터 글로벌 제약사인 카비가 혈액백 입찰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했고,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국내 혈액백 시장을 장악한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2018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혈액백 입찰을 둘러싼 적십자와 녹십자 간 관계는 동맹을 넘은 담합 관계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종현 기자
또한 적십자는 2016년 6월 ‘보조혈액 저장용기에 한하여 비프탈레이트계 가소제를 사용’ 규정을 신설했다. 당시 녹십자엠에스는 비프탈레이트계 가소제를 사용했고, 카비는 프탈레이트계 가소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적십자는 2018년엔 혈액백 내 포도당 수치가 미달된다며 카비의 혈액백을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혈액백에 들어가는 항응고제 성분 중 하나가 포도당이다.
2018년 6월 혈액백 공급 입찰엔 녹십자엠에스와 카비 두 업체가 참가했지만 결국 녹십자엠에스가 전량을 따냈다. 하지만 이때 녹십자엠에스는 카비의 등장으로 혈액백 입찰 단가를 한순간에 내렸다. 그동안 가격을 부풀려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부분이다.
녹십자엠에스 관계자는 2018년 혈액백 단가를 급격히 낮춘 이유에 대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영업 전략이라 밝히기 어렵다”고 전했다.
지난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국가혈액관리위원회 소속 차영주 교수는 “해당 업체(카비)의 혈액백은 국제적으로 이미 공인된 혈액백이다. 떨어질 이유가 없다. 입찰과 관련한 부분은 적십자사가 자의적 기준으로 진행한 부분이 있다”며 “혈액과 관련한 정책을 꾸준히 펴나가려면 적십자사를 지원하며 관리 감독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나라는 국가혈액안전관리원 등의 기구가 상시적으로 있는데, 우리나라도 신속히 그런 기구를 만들어서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