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열다섯의 나를 500달러에 팔아먹었다…15세 연하 커처 앞에서 소녀가 되고 싶었다”
어느덧 50대 중반을 넘긴 중년 배우가 되었건만 할리우드에서 무어의 존재감이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최근 출간된 자서전 ‘인사이드 아웃’의 반향만 봐도 그렇다. 출간되자마자 온갖 화제를 뿌리고 있는 이 책은 현재 할리우드는 물론이요, 서점가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으며, 파란만장했던 무어의 과거와 함께 은밀했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9월 24일 출간된 ‘인사이드 아웃’에서 무어는 우여곡절 많았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무어는 “여러분의 내면에 치유되지 않은 수치심과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 어떤 돈도, 그 어떤 성공도, 그 어떤 유명세도 그것을 채워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과 영혼’ ‘어퓨굿맨’ ‘지 아이 제인’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인 무어는 지금은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할리우드에서는 가장 몸값이 높은 여배우였다. 무어가 할리우드에 데뷔한 것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16세 때였다. 당시 무어는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학교를 중퇴한 채 일찌감치 집을 나왔고, 18세 때 결혼을 하는 등 또래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5세 때 벌어졌다. 당시 어머니의 묵인 하에 한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무어는 책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술집을 다녔기 때문에 당시 40대 혹은 50대로 보였던 한 남자와 자주 마주쳤다. 그 남자는 언제부턴가 학교 앞까지 찾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남자가 집안에 앉아 있었다”고 밝혔다.
그날 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무어는 “수십 년 동안 나는 그것이 성폭행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로 알았다. 왜냐하면 그 남자가 나에게 기대했던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그것을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포식자들의 쉬운 먹잇감이었다”고 털어놨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남자가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던 사람이 바로 무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무어는 “그것은 성폭행이자, 충격적인 배신이었다”고 덧붙였다. 무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폭행 직후 남자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어린 무어에게 “500달러에 어머니한테 매춘을 당한 기분이 어떠냐”고 물은 것이다.
이 성폭행 사건은 무어의 어린 시절을 괴롭힌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무어는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던 어머니 때문에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이에 대해 무어는 책에서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어머니가 삼켰던 약을 목구멍에서 손가락으로 파냈던 것을 기억한다”면서 “내 어린 시절은 그 순간 끝났다”고 적었다.
자서전 ‘인사이드 아웃’.
무어는 딱히 프레디에게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어는 “나는 결혼하기 전날 밤에도 결혼 서약을 작성하는 대신에 영화 세트장에서 만난 다른 남자를 보러 나갔다”면서 “당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무어는 결혼 후에도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웠고, 둘의 결혼생활은 1984년 끝나 버리고 말았다.
배우가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떠난 무어는 당시에 대해서 “그것은 자신감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나는 잃을 것이 없었다”고도 했다. 무어는 드라마 ‘종합병원’에 캐스팅되면서 서서히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무어는 내내 술과 코카인에 중독된 채 피폐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무어는 “나에겐 ‘꺼짐 스위치’가 없었다. ‘이제 그만하면 충분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자신이 통제불능에 가까웠다고 회고했다.
그를 살린 것은 영화 ‘세인트 엘모스 파이어’였다. 당시 영화 제작팀은 무어에게 재활원을 가지 않으면 배역을 잃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무어는 “그 충고는 제작진이 내게 준 엄청난 선물이었다”라고 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인 무어는 재활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경험에 대해 무어는 “나는 아침에 눈을 떠서 전날 밤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짓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재활과정에 온전히 전념했다”고 책에 적었다.
이 때문에 ‘세인트 엘모스 파이어’를 자신의 인생을 바꾼 영화라고 말하는 무어는 “그때 만일 재활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내가 아직 살아있을지조차 의문”이라고도 했다. 실제 무어는 그 후 20년 동안 술을 완전히 끊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만난 에밀리오 에스테베스와 약혼까지 했지만 둘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헤어진 후에도 친구로 남은 둘은 영화 시사회에 동행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이런 우정은 결국 훗날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는 데 가교 역할을 했다. 이에 관해 무어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영화 시사회에 동행한 그날은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밤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당시 ‘문라이팅’이라는 드라마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한 배우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브루스 윌리스였다.”
1987년 윌리스를 만난 무어는 처음에는 그가 거만한 사람이라고 오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 “진짜 신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둘의 로맨스는 4개월 만에 결혼과 임신으로 이어지는 등 속사포처럼 빠르게 진행됐다. 윌리스는 무어의 집 앞에 차를 몰고 와 대기하고 있거나 개인 제트기를 타고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는 등 무어를 공주처럼 대해주었다. 무어는 “윌리스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두려움과 불안을 그의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고 했다. 당시 윌리스는 36세, 무어는 25세였다.
데미 무어는 브루스 윌리스와 13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세 아이를 낳았다. 1997년 8월 영화 ‘지 아이 제인’ 홍보투어 당시의 데미 무어-브루스 윌리스 부부. 사진=로이터/뉴스원
하지만 윌리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당신이 영화를 찍는다면 가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윌리스는 무어가 가족 이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무어는 “글쎄,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확신을 주었고, 결국은 캐나다 국경 바로 너머에 있던 촬영장에 루머를 데리고 가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서는 남편의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1990년에는 영화 ‘사랑과 영혼’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그에 따르는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부부 사이에 위기가 찾아오고 만 것이었다. 당시 차기작인 ‘허드슨 호크’를 찍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야 했던 윌리스는 무어에게 “내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무어는 윌리스가 연애, 결혼, 그리고 첫 아이를 가짐으로써 빠르게 안정을 이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흥분과 새로움도 갈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무어는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36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했고, 부도 쌓은 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유럽으로 떠나려는 윌리스에게 무어는 “가라”고 말했지만, 결국 윌리스는 결혼을 깨거나 무어를 떠나지는 못했다. ‘허드슨 호크’ 촬영장으로 윌리스를 방문했을 당시 무어는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고, 윌리스는 여전히 무어가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둘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윌리스가 촬영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무어가 둘째를 임신하면서 회복됐다. 둘째 딸 스카우트가 태어나면서 부부 사이는 정상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였고, 둘은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셋째 딸 탈룰라가 태어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셋째 출산 후 영화 ‘스트립티즈’에 출연한 무어는 1200만 달러(약 144억 원)라는, 당시로서는 최고였던 개런티를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할리우드 여배우 가운데 가장 높은 출연료였다. 동시에 윌리스와의 결혼생활은 서서히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무어는 “처음부터 우리는 둘 다 결혼생활보다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다”면서 결국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13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이혼한 무어는 아이다호에서 세 딸을 키우면서 전업주부로서 시간을 보냈다.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냈으며, 윌리스도 이혼은 했지만 좋은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오히려 둘은 이혼 전보다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어는 책에서 “윌리스는 지금도 여전히 소중한 친구이자 소중한 가족“이라고 했다. 이에 재혼하는 윌리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한 무어는 “이제 세 딸들에게는 마벨과 에블린이라는 엠마와 브루스 사이에서 태어난 두 명의 어린 여동생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계속해서 늘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서로를 위해 있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15세 연하였던 세 번째 남편인 애시튼 커처와 만났을 때 무어의 나이는 42세였다. 25세였던 커처와 불같은 사랑에 빠친 무어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젊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커처와 함께 나는 20대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데미 무어는 15세 연하의 애시튼 커처 앞에서 즐겁고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2011년 6월 뉴욕의 행사에 참석한 부부. 사진=AP/연합뉴스
커처와 데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임신한 무어는 6주 후에 약혼식을 올렸다. 당시 뱃속의 아이는 딸이었으며, 무어는 직접 ‘채플린 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유산의 아픔을 겪었으며, 이에 무어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2005년 결혼식을 올린 후 무어는 다시 임신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시도했던 체외수정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커처는 무어에게 스리섬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무어는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마지못해 동의했다. 내가 얼마나 유쾌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두 차례 스리섬을 한 후부터 커처의 불륜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무어는 두 번째 바람을 피운 사실이 발각된 후 커처가 곧바로 불륜 사실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무어는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토할 뻔했다”고 회상하면서 섭식장애를 겪은 탓에 몸무게가 44kg밖에 안나갈 정도로 건강도 악화됐다.
결국 무어는 2011년 커처와 헤어졌고, 그 후 무어의 인생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책을 통해 무어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내 평생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바람을 피웠고, 결국은 결혼 생활을 지속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 아이들은 나와 말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수년 동안 친구로 지냈던 아이들의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사라진 상태였다”고 썼다.
이혼 후 마약 중독에 빠친 무어는 2012년에는 딸이 보는 앞에서 합성 마리화나를 피우다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심각한 마약 중독 증상을 보이자 세 딸들은 무어에게 최후통첩을 하면서 연락을 끊어버렸다. 딸들은 무어에게 “재활치료를 받지 않으면 다시는 엄마랑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실제 딸들은 그녀의 50번째 생일에도, 어머니날에도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자가면역질환과 소화기 질환을 앓은 무어는 구체적인 병명은 밝히지 않은 채 “내 장기들이 서서히 멈추는 증상을 포함해서 몸 안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었다”면서 “원인은 높은 바이러스 수치였다”고 털어놨다.
결국 무어는 트라우마, 의존증, 약물 남용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건강을 되찾기 위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늪에서 빠져나온 무어는 다시 자녀들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리고 커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안정감을 찾았고, 윌리스와는 다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무어는 “나는 이 인생에서 특별한 행운을 누렸다.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글로 적어 놓으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는지, 얼마나 별났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책에서 밝혔다.
딸들 역시 어머니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 “분명히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부모 역시 한 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면서 “엄마가 너무 자랑스럽다. 너무 아름답다”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무어 vs 커처 ‘몰카사진’ 공방전 애시튼 커처가 트위터에 올린 데미 무어의 뒷모습. 데미 무어의 자서전을 통해 폭로된 애시튼 커처와의 8년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특히 스리섬을 제안했다는 사실과 불륜 사실에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현재 밀라 쿠니스와 결혼해 1남 1녀를 낳은 커처는 자서전 출간 직후 트위터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트위터에 좋지 않은 말을 올리려다가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를 보고는 삭제했다”면서 이어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인 “인생은 좋은 것이다”라는 글도 함께 올렸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커처는 “진실을 알고 싶다면 문자를 보내라”는 글과 함께 전화번호를 올리기도 했다. 이 글이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무어가 반격에 나섰다. 2009년 커처가 무어의 뒤태를 몰래 촬영해 엄청난 화제가 됐던 이른바 몰카 사진에 관한 비난이었다. 당시 커처는 흰 속옷 차림의 무어가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몰래 촬영했으며, ‘쉿, 마누라한테는 비밀’이라는 글과 함께 이 사진을 트위터에 올려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비난이 거세지자 커처는 “그건 속옷이 아니라 비키니였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 같다. 아내는 내 바지를 다림질하고 있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사진을 찍은 후에 인터넷에 공유해도 되는지 아내에게 물었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무어는 비난했다. 무어는 자서전에서 당시 사진에 대해 “그 사진을 온라인에 공유한 것은 나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다”고 했다. 당시 알코올 중독과 싸우고 있었던 무어는 사실은 변기에 머리를 박고 오바이트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커처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찍은 이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으며, 이에 대해 무어는 “그때는 가벼운 장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