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미술에 대한 꿈 가난 때문에 포기…부모의 부가 아이 꿈 좌우하는 현실이 정치하게 해”
심요한 감독(35)이 청년 정치인을 다룬 영화 ‘비례대표(가칭)’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서핑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로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관객상을 거머쥔 충무로 예비 스타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의 한국 영화 신예 발굴 프로젝트 S#1(씬 원) 아카데미 1기로 선정돼 내년 2월까지 ‘비례대표’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일요신문은 심 감독과 청년 정치인의 만남을 주선해 청년 정치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
[일요신문] 같은 당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장하나 전 의원이 그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짐을 푼 지 1년도 안 된 2013년 12월 8일 그는 외쳤다. “사퇴하라.” 진짜 사퇴 요정의 탄생이었다. 장 전 의원의 소속 정당이었던 민주당 역시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여전했다. 돌아오는 총선을 준비하면서 문재인 정부까지 싸잡아 비판했다. 여전히 “기존 정치인은 다 싫다”는 그를 만났다.
11월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카페에서 장하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심요한 감독이 만났다. 사진=최준필 기자
“내가 국회의원이 됐던 이야기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면 다들 말이 안 된다고 할 거다.” 그가 심요한 감독을 만나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국회의원이 된 과정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아무런 기대 없이 비례대표 신청서를 냈던 까닭이었다.
그는 자신이 비례대표를 신청하게 된 이유를 “오디션에 사람이 꽤 몰렸다고 들었다. 예비 정치인이 많으니 내가 하는 운동 알리는 전단지나 돌리자는 심정을 갔다”고 했다. 그는 2012년 19대 국회를 앞두고 민주당의 청년 비례대표 경선 공개 오디션에 참여했다. 모두 389명이 지원했다. 당시 그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중인 당원이었다.
그가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시민운동을 하다 정치권으로 편입되는 보통의 노선과 정반대였다. 1996년 연세대에 입학한 장 전 의원에게 학생운동 구호는 꽤 매력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같이할 순 없었다. 운동권의 얼차려 문화가 싫었던 까닭이었다. 졸업 직전 열린우리당에 가입한 게 그가 학창 시절 유일하게 한 정치적 행보였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 진행되는 걸 보고 “내 주권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에서 한 일이었다.
졸업할 생각도 사실 없었다. 그는 “믹스 커피를 타는 일이어도 대졸자는 돈을 더 준다”는 말에 2004년 졸업장을 땄다. 학사경고를 세 번이나 받으며 8년을 쏟아 받은 증명서였다. 그 뒤 어릴 때부터 살았던 제주도로 돌아온 그는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간사가 됐다. 손 빌려달라는 엄마 친구의 요청 때문이었다. 말이 간사였지 경리 같은 업무였다. 2007년 민주당 제주도당 대변인을 거치며 2010년에 제주도 도의원 출마했다가 떨어지는 등 정당 생활을 했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도와달라는 지인의 부탁으로 그는 본격적인 사회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있었던 민주당 청년 비례대표 경선 공개 오디션은 자신의 운동을 홍보할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 그는 홍보에만 그치지 않았다. 성미를 버릴 수 없던 탓이었다. “법안 만들어 봐라, 말하는 것도 해봐라”라는 등의 과제를 차곡차곡 해가며 온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는 “평범한 비운동권 청년에게 열린 정당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하는 정치라면 내가 베스트이진 않지만 ‘쟤들보단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장하나 전 의원은 “청년 문제라는 게 청년으로 살아 봐서 아는 것 아니냐”며 자신이 살아온 날들과 그 안에서의 고민을 담당한 어조로 얘기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특히 그는 정신적으로 이미 정치인이었다. 제주에 있던 시절 중증장애인센터 활동보조인과 야학교사 일은 그를 성장시키는 열매였다. 장하나 전 의원은 “단순히 보람차지 않을까 해서 시작한 일이 인생을 통째로 바꿨다. 나는 진짜 권리가 뭔지 모르는 바보였다. 그 사람들은 오줌 누고 싶어도 주변에 폐 끼칠까 두려워 물을 안 먹었다. 배고파도 참고 나중에 몰아서 먹었다. 그게 잘못됐다고 느끼면서 운동하는 새로운 삶이 내게 왔다”고 했다.
말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무기다. 그는 “당시 난 우울과 무기력에서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한 중증뇌성마비 장애인의 발언을 듣게 됐다. 알아듣기 힘들었고 아주 짧은 내용이었지만 길게 발언을 했을 때 엄청난 영감을 얻었다. 중증뇌성마비 장애인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근육만 문제일 뿐이다. 지적으론 아무 문제없다.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 말하는 그 자체가 주는 힘을 알게 됐다. 어마어마한 삶의 무기력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치란 그에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는 교육이다. 우리는 비정치 교육을 받는다. 늘 “가만히 있어”란 소리를 듣는다. 그도 어릴 때는 꿋꿋한 게 미덕인 줄 알았다. 그에게 가난은 친구였다. 악기가 좋아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악기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꿨다. 그게 초등학교 6학년 때다.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고교 1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모친의 가게로 찾아와 “아이가 성적이 되니 미술학원을 조금만 보내면 서울대 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채 석 달을 못 갔다. 궁핍한 환경에 그의 꿈은 꺾였다.
“가난하면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커온 그였다. 지금은 다르다. 그는 “돈이 없다고 꿈을 포기하는 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아이의 꿈이 부모의 부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건 나라가 아니라 개차반이다. 부모가 못 도와주더라도 아이가 꿈을 좆는 건 부와 상관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잘하냐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행복추구권이 꺾이는 정부는 위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이 나를 정치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 그는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을 이끄는 선봉장이다.
장하나 전 의원은 “아이가 꿈을 좆는 건 부와 상관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추구권이 꺾이는 정부는 위헌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그는 청년을 가로막는 문제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시민단체조차 상부는 청년에게 열려있지 않다. 그 문도 안 여는데 청년 국회의원이 어떻게 나오냐”는 반문으로 답을 시작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한국 보고서를 보면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양극화다. 이걸 해결하려면 일단 노동시간이 줄어야 한다. 우리는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하라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을 준다. 직업이 곧 자아가 돼서 절반이 넘는 시간을 노동에 투입한다. 절반도 안 되는 나머지 시간이 내 것이 되면 내 삶이 없다. 안 잘리는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자기 시간도 갖고 다른 활동도 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다. 현 정부도 문제가 많다. 노동 문제는 재계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니 후퇴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이니 포용 복지니 다 끝났다.”
그는 아직 할 말도 많고 할 일도 많단다. 돌아오는 총선 때 도전장을 내밀까 고민하는 입장인데도 정부 비판 등 할 말은 한다. 장하나 전 의원의 꿈은 비단 의원 배지 한 번 더 다는 일이 아니다. 노벨상이다. “난 하려면 그 정도는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꼭 상은 아니더라도 큰 존경을 받고 싶다. 멋진 사람으로 말이다”라고 했다. 어릴 때 장하나 전 의원은 많은 장래희망을 가진 아이였다. 화가, 판사,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 돋보이는 직업을 특히 갖고 싶어 했다. 그러다 그는 확실치 않지만 가장 어릴 때 기억나는 장래희망을 하나 말했다. 간호사였다. 삶에 치인 부상자는 어제도 오늘도 장하나를 찾는다. 그는 ‘당사자 정치’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오늘도 말한다.
“나 같은 사람 없다 역시.”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심요한 감독은 누구? 심요한 감독은 최근 충무로에서 주목 받는 영화감독이다. 1984년생인 그는 2011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대형 광고 기획사에서 4년 정도 근무했다. 회사원 가운데 가장 자유분방한 광고업계도 그에게는 답답했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영화쟁이 꿈을 버릴 수 없었다. 2014년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 201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으로 향했다. 11월 14일 이준석 전 최고위원과 이기인 시의원을 인터뷰 하는 심요한 감독. 사진=이종현 기자 낭중지추, 그가 주머니를 뚫고 나온 건 2016년 일이었다. 그가 연출한 영화 ‘훌륭한 영화’가 2016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국제경쟁 본선에 진출했다. 이듬해 서핑광인 그는 한국에서 생소한 서핑 영화 만들기에 착수했다. 그렇게 탄생한 독립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는 2019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관객상을 거머쥐었다. 독립영화지만 배우 손종학과 신재훈 등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진흥위원회 씬 원 아카데미 1기에 발탁된 그는 현재 영화 ‘비례대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내년 2월 완성될 이 시나리오는 그의 첫 상업영화 도전작이 될 예정이다. 최훈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