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째 가족경영 발렌베리 경영권만 인정, 직접 소유 안해…부모 도움 없이 대학 졸업 등 원칙 명문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 사진=임준선 기자·연합뉴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8일 서울 송파구의 한 호텔에서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 회장과 단독 면담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렌베리 회장은 스테판뢰벤 스웨덴 총리와 함께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방한했다. 발렌베리 회장은 ‘한·스웨덴 비즈니스 서밋’에도 참석, 5G 이동통신 분야 등에서 협력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부회장과 발렌베리 회장이 이번 면담에서 양사 간 5G와 인공지능, 스마트시티 등 미래먹거리 사업 협력 방안과 지배구조 개선 등에 대해 논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발렌베리그룹은 삼성 오너일가가 ‘롤모델’로 삼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곳이다. 발렌베리그룹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 상장주식 시가총액 40%를 차지하는 최대 기업이다. 인베스터AB를 통해 스웨덴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가전기업 일렉트로룩스, 중공업기업 ABB, 건설장비기업 스카니아, 제약기업 아스트라제네카와 은행 등 100여 개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창업주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지난 1856년 SEB를 창업, 사세를 키우며 160여 년 동안 발렌베리 가문이 5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 스웨덴 총리와 함께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방한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은 동갑내기(63세) 사촌 야코브 발렌베리 인베스터AB 회장과 ‘투톱’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처럼 제조업이 다수 포함된 재벌 중 여러 대에 걸쳐 경영권을 물려받는 사례는 드물다. 그러면서도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 오너일가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입장에서는 창업 이후 오너경영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사회적 존경까지 받는 발렌베리 가문의 비결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을 것.
이에 이건희 회장은 2003년 7월 이재용 당시 상무,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과 함께 그룹 지주사인 인베스터AB와 발렌베리 가문의 오너들을 만났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이 스웨덴에 1년가량 파견 나와 스웨덴의 기업문화와 지배구조를 집중 연구하기도 했다. 이후 삼성가와 발렌베리가문은 꾸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발렌베리 회장은 2012년에도 한국을 방문, 당시 이재용 부회장은 발렌베리 회장을 리움미술관으로 초대해 만찬 등을 함께했다.
실제 삼성 오너 일가와 발렌베리 가문은 경영권을 자손들에 승계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닮았지만, 결정적 차이도 있다. 발렌베리 가문이 지배하는 여러 기업들은 ‘독립 경영’이 원칙이다. 또한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가문이 기업 주식을 직접 소유하지는 않는다. 발렌베리그룹은 지주사 인베스트AB를 통해 기업들을 지배하고, 그 정점에 발렌베리 재단이 위치해있다. 인베스터AB가 계열사들로부터 받은 배당이익을 재단에 보내면, 재단은 이익금 대부분을 연구개발, 대학 지원 등 사회공헌활동에 쓴다. 이와 별개로 각 기업의 이익금 85%도 법인세로 납부하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의 사람들은 재단의 돈에 손을 댈 수 없고, 자신이 일하는 공익재단과 계열 기업에 재직하면서 급료를 받을 뿐이다. 이에 스웨덴 최대 기업의 가문 구성원이지만 재산규모는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하는 세계 1000대 부자는 물론, 스웨덴 100대 부자 명단에도 끼지 못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그룹의 후계자를 고르는 방식과 기준에서도 차이가 있다. 발렌베리그룹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려면 원칙이 있다. “부모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 해외유학을 마칠 것” “해군 장교로 복무할 것”이 최소 조건으로 명문화돼 있다. 실제 160년 동안 창업주에서 5대까지 이어져온 대부분의 경영자가 이 요건을 갖췄다.
이어 식견을 넓히기 위해 뉴욕, 런던, 파리 등에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것을 권장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이들끼리 경쟁을 벌이다보니 후계자 경쟁은 치열하다. 이번에 이 부회장을 만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역시 스웨덴 해군사관학교와 미국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스웨덴 해군에서 중위로 복무하고 1980년 미국 시티뱅크 본사를 시작으로 독일 도이치방크, 영국 SG워버그 등에서 금융 실무를 익히고 나서야 2010년 SEB 회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삼성 오너일가의 후계자 선정 방식은 치열한 경쟁구도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차남 이건희 회장은 장남 이맹희 CJ 명예회장을 제치고 경영권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따로 경쟁자가 없는 유일한 후계자로 거론돼오고 있다.
이 부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원,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에서 유학을 했다. 당시 1995년 이재용 부회장은 부친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0억 8000만 원을 증여받았다. 이 돈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삼성전자·삼성에버랜드·제일기획의 전환사채(CB)를 거쳐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제국을 손에 넣는 발판이 됐다.
또한 이 부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직후 유학을 떠났고, 돌아와서는 바로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승진했다. 삼성과 무관한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그곳에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없었다. 군 복무 역시 이재용 부회장은 허리 디스크를 이유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 삼성 세습 문제를 지적해 온 학계 관계자는 “삼성 오너일가가 발렌베리 가문을 벤치마킹한다고 하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 발렌베리그룹은 노동자 대표를 이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이재용 부회장과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단독회동을 하기 전날인 17일, 법원은 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혐의에 대해 ‘삼성 2인자’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에게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하는 등 관련자 26명을 유죄 판결했다.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을 향한 정황 증거에도 검찰은 이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