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가수’ ‘1990년대 지드래곤’ ‘탑골 GD’ 등으로 불리며 2020년 ‘활짝’
#‘온라인 탑골공원’이 발굴한 스타
양준일은 유튜브가 다시 찾아낸 스타다. 몇 개월 전부터 ‘시대를 앞서 간 가수’ ‘1990년대 지드래곤’ ‘탑골 GD’ 등의 평가를 받으면서 유명세를 타더니 지금은 넘볼 수 없는 화제의 스타로 떠올랐다. 가수로 데뷔한 1991년 당시 상상도 못한 폭발적인 반응이다.
양준일 인기의 진원지는 유튜브 ‘온라인 탑골공원’이다. 사진은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과거 활동 당시 방송 화면 캡처.
양준일 인기의 진원지는 이른바 유튜브의 ‘온라인 탑골공원’이다. 최근 유튜브에서는 과거 지상파 음악프로그램들이 다시 주목받았다. 어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의 느낌을 내는 과거 콘텐츠라는 이유에서 이런 방송 내용은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불렸다. 그 최대 수혜자가 다름 아닌 양준일이다. 1990년대 가요계를 기억하는 4050세대에게는 ‘추억 공감’, 1020세대에게는 빅뱅의 지드래곤과 흡사한 외모와 음악성으로 호기심을 자극한 그가 30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준일 신드롬을 만든 기폭제는 JTBC 음악프로그램 ‘슈가맨’이다. 유튜브에서 한창 화제를 모을 때까지도 양준일의 행방은 사실상 오리무중이었다. ‘일산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등 그를 둘러싼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런 양준일을 ‘슈가맨’ 제작진이 수소문한 끝에 미국 플로리다에서 찾아냈고, 12월 6일 방송 무대에 세웠다. 이후 상황은 양준일의 말처럼 “기적의 연속”이다.
1990년대 초반 양준일이 발표한 ‘가나다라마바사’ ‘리베카’ 등 음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멜로디와 퍼포먼스였다. 발라드와 트로트가 대중음악의 주류로 각광받던 시기에 양준일의 시도는 지나치게 실험적인 탓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게다가 하필 비슷한 시기, 시대를 뒤흔든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까지 등장했다. 양준일의 음악적 실험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으면서 ‘비운의 가수’로 남게 됐다.
몇 차례 재기를 모색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양준일은 연예계를 떠나 한때 경기도 일산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했다. 그러다 2001년 한국을 떠났다. 그로부터 다시 18년이 흘렀다. ‘기적의 주인공’으로 돌아온 그는 201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서울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생애 첫 팬 미팅을 열고 3600여 명의 팬과 만났다. 데뷔 이래 팬들과 처음 만난 자리다.
이날 총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팬 미팅 티켓은 12월 20일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됐다. 열기는 팬 미팅 장소인 세종대 대양홀 주변에서도 어김없이 목격됐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공연장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수많은 팬들로 북적였다.
팬 미팅에 앞서 취재진과 만난 양준일은 “지금은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감격해했다. 몇 달 사이에 급격히 달라진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는 믿기지 않는 듯 혀를 내둘렀다. 20여 년 전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연예계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슈가맨’ 출연 당시만 해도 자신의 방송 출연이 일회성 무대로 그칠 줄로 알았다는 양준일은 곧장 짐을 챙겨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긴박하게 변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 중 받은 팬의 전화는 그를 자극한 결정타가 됐다. 그 팬은 양준일에게 “지금 한국은 난리가 났는데,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질타(?) 했다. 때마침 방송과 광고 등으로부터 숱한 러브콜까지 쏟아지자, 그는 다시 짐을 싸서 부랴부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양준일 신드롬을 만든 기폭제는 JTBC 음악프로그램 ‘슈가맨’이다. JTBC ‘슈가맨’ 방송 화면 캡처.
#“90년대 한국 가요계와 맞지 않았다” 고백
여기저기서 양준일 인기의 배경을 분석하고 있다. 유튜브의 힘이라는 의견과 더불어 복고 감성을 선호하는 레트로 열풍에 힘입었다는 해석도 따른다. 당사자인 양준일의 생각은 어떨까. “감히 이유를 파악할 수 없다”는 그는 “예전에 가수로 활동할 때도 내가 시대를 앞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1990년대 초반, 내 음악은 한국 가요계와 맞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아홉 살 때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지에서 살아온 양준일은 여전히 우리말이 서툴다. 한 마디씩 신중을 기해 내뱉을 수밖에 없어 말투가 느리다. 마음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데 말보다 글이 더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현재 그는 돌아온 시간을 정리하는 내용의 책을 쓰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고, 생각을 글로 표현해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30년이면 외모도, 성격도, 변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일 텐데 양준일에게서는 그때 그 향기가 여전하다. 탁월한 패션 감각도 변하지 않았다. ‘아재’가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오히려 시간을 역행하는 분위기를 내는 이유는 “바쁘게 지낸 일상”의 산물이다. “미국에서 하루 14시간 동안 서빙 일을 하다 보니 바쁜 날에는 하루에 16km 정도 걸은 셈이 됐다”는 그는 “살기 위해 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살이 빠졌다”고 말했다.
‘유물 스타’ 양준일을 향한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얼마 전 팬클럽 회원 수가 55000명을 돌파했다. 옥외광고를 통해 그를 응원하는 팬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벌써 CF까지 찍었다. 2020년의 시작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열고 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