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요구 따라 독립적인 준법감시위원회 구성 준비…“재판부 판단의 참고 사항일 뿐”
삼성이 준법경영 강화방안의 하나로 ‘준법감시위원회’ 구성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난 2일 밝혔다. 내부 경영진으로 구성하거나 이사회 산하기구가 아닌 완전히 분리된 형태의 위원회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그룹 계열사 전반의 준법경영 시스템을 관리 감독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에선 사장급 규모의 조직으로 예상하고 있다. 삼성에서 사장급 임원이 운영하는 조직은 반도체, TV 등 핵심 사업부들이다.
초대 준법감시위원장은 김지형 전 대법관을 내정했다. 법조계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과 함께 진보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위원회는 외부 인사 6명과 삼성 출신 관계자 1명 등 7명 안팎으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삼성은 활동할 위원 선정을 마치고 구체적인 그룹 내 위원회 위치와 규모, 형태 등을 두고 막바지 조율 중이다. 삼성 관계자는 “김지형 전 대법관이 직접 구체적인 운영 방안 등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2월 6일 파기환송심 3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재판부는 이날 “권력자로부터의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려면 기업이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변을 다음 기일까지 제시하라”고 말했다. 사진=임준선 기자
# 긴박했던 삼성의 12월
이번 준법감시위원회 구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평가되는 정현호 사업지원TF(태스크포스)팀장이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 사업지원TF는 사실상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 사장단도 위원회 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난 12월 17일 삼성전자와 삼성SDS, 삼성SDI,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 사장 1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준법경영 체제 구축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삼성은 2017년 3월 그룹 컨트롤타워였던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삼성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열지 않았다. 이후 계열사별로 경영해오다 2년 9개월 만에 한 자리에 모여 준법경영 시스템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재계 관계자는 “당초 이날 회의에서 삼성 사장단이 이재용 부회장 재판과 그룹 핵심 임원들이 연루된 노조와해 재판 등 그룹을 둘러싼 각종 ‘법률 리스크’와 미뤄진 연말 정기인사 등에 대해 논의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면서도 “그러나 결과적으로 회의는 준법경영 시스템 구축에 집중됐다“고 말했다. 이어 “계열사 전체를 총괄하게 될 시스템인 만큼 운영 방안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 삼성 계열사 임원들은 사장단 회의를 전후로 금융권 임원들과 여러 차례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은 사업 특성상 준법경영 시스템을 다른 산업에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금융감독원도 각종 검사 등 금융사 관리감독 과정에서 준법경영 감시제도 운영 실태를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이재용 부회장은 별도로 지난해 12월 19일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 발렌베리그룹의 총수이자 스웨덴 금융그룹 SEB 대표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회동했다. 발렌베리 그룹은 5대째 가족 세습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이다. 지주사가 약 100개 기업군을 지배하는 구조로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20~3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들이 내는 수익 80% 이상을 과학‧교육에 투자하는 등 사회에 환원하면서 스웨덴 내부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힌다(관련기사 ‘해군 장교 복무’가 최소 조건? 삼성가-발렌베리가의 결정적 차이).
총수부터 계열사 사장단 등이 직접 준법경영 체계 구축에 나선 것은 이재용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주문한 ‘숙제’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의 파기환송 재판 첫 심리에서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이례적으로 △과감한 혁신 △내부 준법감시제도 △재벌체제 폐해 시정 등의 세 가지를 삼성에 주문했다.
지난 12월 초 3번째 공판에선 이재용 부회장 측이 “삼성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한 요구를 받고 수동적으로 지원했으니 다른 기업들의 사정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자, 재판부는 “앞으로도 정치 권력자로부터 똑같은 요구를 받을 경우 뇌물을 공여하겠느냐”며 “그런 요구를 받더라도 기업이 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변을 다음 재판 기일 전까지 제시해 달라”고 못박았다. 다음 재판 기일은 1월 17일이다. 삼성은 3차 공판 이후 본격적으로 준법경영 체계 구축에 나선 셈이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건물 전경. 사진=고성준 기자
# ”재판부 판단의 참고 사항일 뿐“
삼성이 재판부가 요구한 내용에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이 이재용 부회장의 형량 판단에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현재 파기환송심 재판의 핵심 쟁점은 양형 판단이다. 이 부회장 측은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대법원 판단을 존중해 유무죄는 다투지 않고 양형만 다투겠다”며 ‘작량감경(재판부가 재량으로 형을 줄여주는 행위)’을 염두에 둔 전략을 앞세우고 있다. 특검과 검찰은 감형을 막기 위해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 연관된 추가 증거를 내겠다고 맞서고 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지난 10월 25일 이 부회장에게 준법감시제도 강화를 요구하면서 참고 사례를 제시했다. 1981년 제정된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인데, 원문을 보면 기업이 엄격한 준법감시 및 윤리프로그램을 구축할 경우 재판부가 재량으로 형량을 줄여줄 수 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기준에 따라 실제로 감형된 사례도 있다.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준법 감시 체계 구축을 요구하고, 구체적으로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을 참고하라고 언급했던 만큼 감형 여지가 있다. 관건은 실효성이다. 삼성은 이미 2011년부터 지금까지 준법감시제도를 운영해 오고 있다. 별도의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준법감시) 조직을 신설해 50여 명의 직원이 운영해왔으나 제한적 역할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삼성 법무실 하부 조직으로 사실상 경영진과 분리되지 않았고, 업무 역시 사실상 일부 사업의 ‘사후 점검’에 국한됐다.
삼성은 외부 인사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준법감시위원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지만 벌써부터 위원회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경영진과 분리된 데다 민감한 영업 비밀이나 내부 정보를 외부 위원들에게 모두 제공할 수 있는지, 계열사 별로 사업 내용이 각각 달라 명확한 기준이 나올 수 있는지 등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재판부가 요구한 내용에 답변했다고 감형이 되는 건 아니다.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시스템을 요구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상당히 세밀하다”며 “준법 감시 시스템 구축은 재판부가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하나의 참고 사항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