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12위 AC 밀란 ‘21세기 최악’ 성적 위기, 즐라탄 구원 요청했지만 재정 난관도 극복해야
2019년 12월 22일 아틀란타와 경기에서 기회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AC 밀란 공격수 수소. 이날 밀란의 0-5 패배는 팀의 현실을 대변해줬다. 사진=연합뉴스
리즈 시절이란 말은 해외축구가 국내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생긴 신조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킨 리즈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관용어와 같이 쓰이게 됐다. 공교롭게도 리즈는 챔피언십(2부리그) 26경기를 치른 9일 현재 1위를 달리며 프리미어리그 복귀 시동을 걸고 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어쩌면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상황의 대명사를 AC 밀란이 이어받을지 모른다.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트로피 진열대를 보유한 팀이 자국 리그 중위권 수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13년 전에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했고 9년 전인 2011년에는 세리에 A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불과 10여 년 사이, 이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밀란의 찬란한 역사
밀란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13회)에 이어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7회)를 들어 올린 팀이다. 세리에 A에서도 35회 우승의 유벤투스에 이어 18회 우승으로 두 번째다.
이들은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화려한 역사를 자랑한다. 현대 축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아리고 사키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1980년대 말부터 전성기를 열어 젖혔다. 현재까지 전설로 회자되는 네덜란드 출신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워 유럽을 지배했다.
이후로도 국내 팬들도 익히 알고 있는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안드리 셰브첸코, 카카 등 무수한 스타들이 밀란을 거쳐 갔다. 이들을 앞세워 2000년대에만 두 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구단 역사에 추가했다.
#갑작스런 추락
하지만 이처럼 빛나던 밀란이 정상권에서 멀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계를 호령하던 구단도 부침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원한 강팀은 없다고 하지만 밀란의 경우는 심각하다. 현재까지 밀란의 마지막 리그 우승 시즌인 2011-2012시즌 이후 이들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리그 우승 직후 시즌에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티아고 실바라는 공수 핵심 선수들을 팔았음에도 3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단 한 번도 5위 이내에 들지 못했다. 급기야 이번 2019-2020시즌에는 시즌 중반임에도 12위에 머무르고 있다. 개막 이후 50일이 되기도 전에 마르코 지암파올로 감독이 잘려나갔고 새 감독 스테파노 피올리를 데려왔지만 반등의 기미가 없다. 되레 지난 12월에는 아탈란타를 상대로 기록적인 0-5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부진에도 끝까지 지켜왔던 10위권도 장담할 수 없다. 21세기 들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할 위기다. 또 다른 문제는 이들이 축구만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재정적 문제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어려운 시기에 놓인 밀란은 팀의 마지막 우승을 만들었던 공격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8년 만에 손을 잡았다. 사진=AC 밀란 페이스북
#돈 없어서 유럽대회도 못 나가는 처지
재정난에 휘청이던 2017년, 중국인 사업가 리용홍이 밀란을 인수했을 때 팬들은 그를 ‘팀을 되살릴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실제 비슷한 시기, 비슷한 처지의 라이벌 구단 인터밀란은 중국 기업 쑤닝이 인수한 후 최근 과거의 위용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리용홍은 현재 밀란 팬들 사이에서 ‘사기꾼’으로 통한다. 밀란 인수 당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 행동주의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에서 받은 대출로 충당했다. 구단 인수 이후 1년이 지날 무렵 리용홍의 빚더미는 그가 해결할 수 없는 규모였고 결국 구단 경영권은 엘리엇으로 넘어갔다.
자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현대 축구에서 밀란의 몰락은 가속화됐다. 한때 세계적 스타들을 돈으로 사 모으던 이들은 이적시장에서의 살림살이부터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스타들의 이름으로 도배되던 영입명단이 초라해진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몸값이 저렴한 젊은 선수를 데려와 성장시켜 비싸게 되팔아 재정을 채우려는 전략으로 임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영입된 젊은 선수들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며 재정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들에게 투자된 금액을 회수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2018-2019시즌 여름·겨울 이적시장에서 밀란의 지출은 약 2200억 원이었지만 수익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약 1020억 원이었다. 2019-2020시즌에는 유로파리그 출전 자격이 됐지만 재정 건전성이 열악해 UEFA의 ‘재정적 페어플레이(FFP) 룰’ 위반으로 출전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살아날 방법은 없나
방만한 경영을 이어오던 밀란은 지금도 매달 10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진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매년 수천억 원의 적자를 쌓아왔다. 최근 이탈리아 언론 가제타 델로 스포트는 “밀란은 지난 30개월 동안 4억 6700만 유로를 퍼부었지만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새로운 구단주의 적극적인 투자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밀란이기에 거대 자본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LVMH(루이비통 모에헤네시)그룹과 꾸준히 연결되고 있다. 루이비통·디올 등 명품 브랜드, 태그호이어·불가리 등 시계 브랜드, 모엣&샹동·돔페리뇽 등 주류 브랜드까지 보유한 이 거대 그룹은 축구단과 경기장 등을 통한 마케팅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자 구단주를 끌어들이기 위해선 구단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번 시즌 팀 순위가 중위권으로 떨어지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은 이번 1월 겨울 이적시장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2019년 한 해 미국 메이저리그사커의 ‘왕’으로 군림했다. 다만 유럽 정상급 리그에서 1981년생 공격수가 얼마나 통할지 의문이다.
불과 10년 전 세리에 A를 제패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세계 최고 구단들과 각축을 벌이던 밀란의 흔적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시즌 남은 일정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 바닥을 찍고 본궤도에 올라설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명문’ 밀란의 행보에 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