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잣대로 80년대를 판단하면 안 돼” 주장도…윤 씨 “받아줄 의향 있다”
20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는 윤 아무개 씨. 이춘재 연쇄살인 8차사건을 수사했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장 아무개 형사는 윤 씨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다만 장 형사는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현장 체모 2점을 DNA 분석해서 신빙성 있는 확정적 증거가 나온 뒤에 (사과하겠다)”고 조건을 달았다. 이어 장 형사는 “우리도 당시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 많이 했다.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평가해선 안 된다. 이렇게 우리를 범죄자로 몰아가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장 형사를 비롯해 8차사건을 수사했던 핵심 인물은 윤 씨 검거로 1계급 특진한 이 아무개 형사계장, 심 아무개 형사반장, 이 아무개 형사 등이다. 이들은 2019년 12월 8차사건을 재조사하던 검찰 소환조사에서 잠을 안 재우거나, 꿀밤 정도의 폭행이 있었다는 등의 일부 혐의를 인정했다. 장 형사는 최 형사와 함께 8차사건 진범 논란이 일기 시작한 2019년 11월부터 핵심 수사 형사로 거론됐다. 최 형사는 지병으로 이미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8차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가정집에서 박 아무개 양(당시 13세)이 강간살해된 사건이다. 범인으로 검거된 윤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했다고 혐의를 부인하며 상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기각됐다.
이춘재가 8차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윤 씨가 경찰의 강압수사를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했다는 정황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윤 씨는 2019년 12월 재심을 청구했다. 윤 씨의 재심에 대한 공판 준비기일이 2월 6일 열렸다.
다만 핵심 형사들 4명의 의견이 일치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아무개 형사는 2월 6일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2월 6일 재심 공판준비기일에 참석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재심 청구인 윤 아무개 씨. 윤 씨는 당시 수사 형사들이 사과한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억울한 옥살이를 20년 동안 했다고 주장하는 윤 씨는 “지금이라도 사과를 한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다. 그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단 걸 지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공판에 들어가서 다툼이 시작된다면 너무 늦는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윤 씨의 재심 청구를 돕는 박준영 변호사도 “당시 거친 수사 관행이 만연했다는 걸 이해한다.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형사 개인에게 묻고 싶진 않다. 이번 재심만큼은 서로 다투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고 설명했다.
한편 재심 공판 준비기일에서 담당 재판부인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김병찬 부장판사)는 윤 씨에게 “법원의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죄송함을 느낀다. 윤 씨는 억울하게 잘못된 재판을 받아 장기간 구금됐다”며 “이미 검찰은 윤 씨가 무죄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록을 제출하고 있고, 이에 관해 변호인이 별다른 이의 없이 동의한다면 무죄 선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이춘재연쇄살인사건을 재수사한 경기남부경찰청은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형사와 검사 등 8명을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이 없지만 직권남용 감금,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등 혐의가 인정된다며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