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응, 라켈 페레이라 프런트에서 ‘역사’ 만들어가…저스틴 시걸, 알리사 나켄 인스트럭터·코치로 그라운드 진입
극적인 스토리라인을 위해 다소 상황을 과장하거나 과거에나 가능했던 에피소드가 일부 등장하기도 했지만, 작가가 여러 명의 현직 야구 관계자들의 자문을 받아 대본을 쓴 터라 야구계에서도 “이전의 여러 스포츠 드라마들과 달리 현실을 충분히 반영했고, 일반 팬들이 잘 모르는 애환들을 잘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30대 여성 운영팀장만큼은 큰 공감을 얻지 못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 스틸컷. 사진=SBS 제공
다만 이 드라마의 많은 인물 가운데 가장 큰 공감을 얻지 못했던 설정은 구단 운영팀장이 30대 여성 이세영(박은빈 분)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극 중에서 이세영 팀장이 역대 최연소이자 첫 여성 운영팀장으로 ‘예외적 사례’라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아직 KBO 리그에서는 이러한 설정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운영팀은 구단 프런트 내 여러 파트 가운데서도 가장 선수단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이 때문에 선수 출신 직원들이 가장 많이 일하고 있는 분야다. 수장 역할을 해야 하는 운영팀장은 물론이고, 운영팀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직원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수도권 한 구단 관계자는 “앞으로 ‘스토브리그’ 시즌 2가 만들어진다면, 이세영 팀장이 어떤 과정을 통해 파격적으로 운영팀장을 맡게 됐는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금녀의 구역’으로 유명하던 야구장의 장벽이 2000년대 들어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KBO에서는 사상 첫 여성 홍보팀장이 탄생했고, 여성 야구 담당 기자 수도 점점 늘어나 이제는 상당수 언론사에서 2명 이상의 여기자가 야구를 취재하고 있을 정도다. 프런트에서도 홍보, 마케팅, 재무 분야에서 점점 여성 인력의 능력을 활용하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분명한 한계도 있다.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현장 보직과 선수단 지원을 맡아야 하는 운영팀 일은 철저히 ‘남성 담당’으로 한정돼 있다. 키움이 지난해 초 임은주 전 프로축구 안양 FC 단장을 새 단장으로 선임해 KBO 리그 출범 38년 만에 첫 여성 단장을 배출했지만,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단장을 교체하고 임 전 단장의 직무를 마케팅 담당 부사장으로 변경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연소 여성 부단장 킴 응, ‘최초 여성 단장’은 아직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KBO 리그보다 먼저 여성에게 다양한 길이 열리는 추세다. 중국계 미국인인 킴 응이 가장 먼저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간 여성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인 아버지와 은행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킴 응은 초등학생 때 뉴욕으로 이사한 뒤 동네에서 친구들과 스틱볼을 하다 야구에 흥미를 느꼈다. 스포츠광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고교 시절 테니스와 소프트볼 선수로 활약했고, 시카고대학교에 다닐 때도 4년간 소프트볼 선수로 활약하면서 대학 리그 내야수 MVP로 뽑힌 경력도 있다.
졸업 후 1990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인턴으로 입사했고, 1991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본격적으로 야구단 업무를 시작했다. 여러 스페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능력을 발휘하자 1995년 화이트삭스 단장이던 론 슐러가 킴 응을 야구 운영부문 부국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부국장 가운데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이었다.
킴 응은 그해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의 연봉조정 청문회에 구단 대표로 참석해 화이트삭스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역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궈낸 성과다. 이후 1997년 아메리칸리그 사무국 운영부문 이사로 일한 킴 응은 29세이던 1998년 뉴욕 양키스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 보좌역으로 이직하면서 또 다시 메이저리그 최연소 부단장 기록을 썼다. 킴 응 이전에 단장 보좌역까지 올랐던 여성은 2명뿐. 1991년 보스턴에서 최초의 여성 부단장이 된 일레인 웨턴-스튜어드와 2001년 양키스 부단장에 오른 진 애프터맨이 전부다.
킴 응은 2001년 LA 다저스 단장 보좌역으로 자리를 옮겨 승승장구했다. 다만 고속으로 치솟던 승진 그래프가 이후 ‘유리 천장’에 부딪혔다. ‘빅리그 최초의 여성 단장’에 도전했다가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이다. 2005년 처음으로 다저스 단장 면접을 봤지만 네드 콜레티에게 밀려 계속 부단장을 맡아야 했다.
이어 시애틀이 빌 바바시 단장 후임을 찾을 때도 물망에 올랐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샌디에이고와 애너하임(현 LA 에인절스) 단장이 해임됐을 때도 킴 응이 후임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현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킴 응은 2011년 8월 10년 넘게 몸담았던 다저스를 떠나 메이저리그 사무국 운영부문 수석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구단 단장이 되겠다는 꿈은 잠시 미뤘지만, 역대 메이저리그 관련 직책에 몸담은 여성 가운데 최고위직에 오르는 발자취를 남겼다. 2015년 미국 유력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수 민족 인사’ 13위와 ‘스포츠에서 가장 파워 있는 여성’ 5위에 올랐다. 킴 응이 걸어온 길이 곧 여성 메이저리그 프런트의 역사로 이어진 셈이다.
#최초의 여성 최고 결정권자 라켈 페레이라
지난해 9월에는 또 다른 여성이 마침내 메이저리그 구단 최초의 여성 최고 결정권자로 등극하는 역사를 썼다. 혁신을 꾀하던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우승 사장인 데이브 돔브로스키를 전격 해고한 뒤 여성인 라켈 페레이라 수석 부사장을 포함한 4인의 공동 운영 그룹에 남은 시즌 구단 업무를 맡겼다. 최초의 여성 부단장을 배출했을 정도로 깨어 있는 팀이었던 보스턴은 시즌 종료 뒤 페레이라 부사장과 다시 다년 계약을 해 향후 최초 여성 단장 탄생의 가능성을 높였다.
페레이라 부사장도 능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1999년 보스턴 구단에 입사한 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운영 부문 여러 파트에서 21년간 일하며 잔뼈가 굵은 베테랑. 그 사이 팀 안팎에서 두루 높은 신망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3명의 부사장, 에디 로메로, 브라이언 오할로런, 잭 스캇과 함께 구단의 최종 의사 결정을 함께 내리는 위치에 충분히 오를 만했다.
스포츠 전문매체 ESPN에 따르면, 페레이라는 비록 ‘공동’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어도 구단 운영 부문에서 역대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여성으로 기록됐다. 특히 KBO 리그보다 훨씬 더 프런트의 권한이 막강한 메이저리그에서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단장의 야구’라는 말이 쓰일 만큼 단장의 권한이 막강한 메이저리그에서 향후 페레이라가 단장 자리를 맡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마이너리그에서는 애리조나 산하 트리플A 팀 리노 에이시즈가 에밀리 잰슨에게 단장 역할을 맡기고 있다.
#더 높은 현장의 벽, 저스틴 시걸이 넘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니폼을 입은 여성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프런트보다 ‘현장’의 벽이 훨씬 더 높기는 마찬가지다. 그 ‘금녀의 벽’을 처음 깬 인물은 오클랜드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로 일한 저스틴 시걸이다.
여자 야구선수 출신인 시걸은 2009년 미국 독립리그팀 브록톤 록스에서 1루 코치를 맡아 처음으로 남자 리그에서 1루 코치를 맡은 여성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선수 시절 일반인 남성도 기록하기 힘든 시속 70마일(약 112km)의 직구를 던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클리블랜드 스프링캠프에서 크리스 안토네티 단장의 제안을 받고 배팅볼을 던지는 기회를 잡으면서 처음 메이저리그 여성 배팅볼 투수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이후에도 캠프 기간 동안 오클랜드, 탬파베이, 세인트루이스, 휴스턴, 뉴욕 메츠 등의 팀을 찾아 배팅볼 투수로 활약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걸은 2015년 10월 애리조나 메사에서 진행된 오클랜드 교육리그에 내야 수비 인스트럭터로 초청돼 빅리그 선수들을 지도했다. 시걸이 인스트럭터를 맡았다는 소식에 메이저리그 전체가 놀란 것은 물론이다. 여성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던,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겠다’는 꿈을 현실로 이뤘다. 시걸의 열정과 능력을 높이 산 빌리 빈 오클랜드 단장이 여성에게 메이저리그 지도자 역할을 맡기는 용단을 내린 덕분이다.
시걸은 스포츠심리학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오클랜드는 캠프에서 시걸에게 야구 경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상황들을 컨트롤하는 법에 관해 강의해달라는 주문도 했다. 그러나 시걸의 역할은 그저 ‘여성 멘탈 코치’에 그치지 않았다. 내야수들과 직접 그라운드에서 부딪히면서 수비 기술을 지도했고, 다른 코치들과 함께 타격 훈련과 피칭 훈련을 모두 보조했다. 한 명의 인스트럭터로 당당하게 인정받은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시걸은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이스라엘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고척스카이돔을 찾기도 했다. 공식 직함은 ‘멘탈 스킬 코치’였지만, 대표팀 훈련 때 배팅볼을 던지고 내야 수비 펑고도 치면서 한 명의 현장 코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시걸은 당시 인터뷰에서 “나는 선수들을 지도하고 도와주는 일을 좋아하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다”며 “남자 선수들 사이에서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소녀들도 (소프트볼을 넘어) 야구에 대한 꿈을 충분히 가져도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시걸이 벽을 허물자 다른 길도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오클랜드가 앞장섰다. 2018년 1월 당시 24세 여성 헤일리 알바레스를 스카우팅 코디네이터로 고용해 신인 드래프트에 필요한 스카우팅 데이터베이스 구축 업무를 맡겼다. 버지니아대학교 재학 당시 오클랜드 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알바레스에게 데이빗 포스트 단장이 ‘스카우트 스쿨’ 입학을 제안했고, 흔쾌히 수락한 알바레스는 구단의 지원 아래 전문 스카우트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신시내티 구단 야구 운영부문에서 행정 일을 배우다 오클랜드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알바레스는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와 인터뷰에서 “야구선수 출신이 아니거나 야구를 해본 경험이 없더라도,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며 “여성들도 야구계 성장에 힘을 줄 수 있고, 팀을 도울 만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다. 여성들의 야구계 진출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알바레스는 앞서 언급한 킴 응, 페레이라 등과 함께 향후 첫 여성 단장이 될 후보로 꼽히기도 한다.
알리사 나켄은 사상 첫 여성 메이저리그 코치라는 발자취를 남겼다. 사진=연합뉴스
#알리사 나켄, 사상 첫 메이저리그 여성 코치
1년 뒤에는 마침내 메이저리그 사상 첫 여성 코치가 탄생했다. 지난 1월 17일 샌프란시스코가 알리사 나켄을 보조 코치로 선임하면서 새 장을 열었다. 나켄은 메이저리그에서 공식 보직을 맡은 역대 첫 여성 코치다. 게이브 케플러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알리사는 우리 팀에서 선수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코치 가운데 한 명이다. 클럽하우스에 ‘이기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해줄 것으로 믿기에 주저 없이 코치로 뽑았다”고 했다.
나켄 코치는 소프트볼 선수 출신이다. 새크라맨토주립대학교에서 강타자로 활약했고, 리그 올스타 1루수로 3회 선정됐다. 졸업과 동시에 은퇴했지만, 이후 샌프란시스코대학교에서 스포츠 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2014년 샌프란시스코 구단 야구 운영 부문 인턴으로 입사한 뒤 운영팀에서 신인 드래프트, 국제 운영, 선수 육성 등의 프로젝트를 두루 소화했다. 지난해에는 선수단의 육체적·심리적 건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양한 능력을 인정받아 메이저리그에서 코치 역할까지 할 수 있게 됐다.
다만 나켄은 경기 중 더그아웃에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을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는 나켄까지 총 13명의 코치진을 꾸렸고, 더그아웃에는 그중 7명만 들어올 수 있어서다. 보조 코치는 자연스럽게 더그아웃 코치진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경기 중 외에는 다른 코치들과 마찬가지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호흡한다. 메이저리그 공식 사이트 MLB닷컴은 “나켄은 빅리그 레벨에서 자신의 보직을 얻은 최초의 여성 코치다. 빅리그에 역사적인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라며 “샌프란시스코는 나켄 외에 양키스 마이너리그 소속 레이첼 발코벡 코치와도 영입 인터뷰를 진행했다. (계약은 불발됐지만) 꾸준히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가 택한 발코벡 코치 역시 나켄 이전까지 새 길을 개척한 여성 코치로 통했다. 지난해 11월 양키스와 마이너리그 풀타임 타격코치로 계약했다. 메이저리그 레벨은 아니라 해도, 마이너리그에서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을 가르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됐다. 그후 2개월 만에 메이저리그 여성 코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급격한 변화에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뛰었던 전 메이저리거 오브리 허프는 자신의 SNS에 나켄 코치 선임 관련 기사를 링크한 뒤 “여성 코치와 클럽하우스에서 한 시즌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고 썼다. 허프는 또 “현역 시절 클럽하우스에서 끈으로 된 속옷을 입고 있었는데 여성 기자가 클럽하우스에 들어와 곤란했던 적이 있다”며 “여성 코치 선임은 믿기 힘든 인사”라고 비판했다.
물론 이 같은 포스팅에 대부분 야구팬은 “여성 기자들은 남성 기자들과 동등하게 클럽하우스에 출입할 권리가 있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라며 비난 댓글로 맞대응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