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두려워 여행도 취소” 범위 정하거나 당사자 동의 필요…질본 “지침 만들 계획도 없다”
질병관리본부가 코로나19 확진자의 이동 경로나 접촉자 현황 등 환자 정보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사생활 침해를 유발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서울시 송파구 잠실주경기장에 운영되고 있는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선별진료소의 의료진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질본은 감염병예방법 34조의 2(감염병위기 시 정보공개)에 따라 코로나19 감염이 확산을 시작한 초기 확진자 이동 경로, 이동수단, 진료의료기관, 접촉자 현황 등을 공개했다. 이때 문제가 됐던 부분은 접촉자 현황이다. 질본은 확진자가 밀접 접촉한 사람 수는 물론 확진자와 접촉자 사이의 관계를 밝혔다.
그 예로 질본은 ‘아내가 아닌 여성과 호텔에서 묵었다‘라든지 ’자가격리를 어기고 처제와 밥을 먹어서 병을 전파했다‘ 등의 내용까지 공개했다. 질본은 과도한 사생활 침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정보 공개 수준을 조정했다. 질본은 홈페이지 확진자 동선 공개에서 ‘아내가 아닌 여성’을 ‘지인’으로 바꿔 기재했다. ‘처제’라는 단어도 삭제됐다.
정보 공개 범위나 절차를 규정하는 명확한 지침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감염병예방법 34조의 2와 같은 법 시행규칙 27조의 3은 ‘감염병 환자의 이동 경로, 이동수단, 진료의료기관 및 접촉자 현황 등을 정보통신망에 게재하거나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개된 사항이 사실과 다를 경우 정보의 당사자(확진자)가 직접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관련법에도 ‘접촉자 현황’을 정의하거나 정보 공개 범위를 규정하는 조항은 없다.
시행규칙이나 지침을 만들어 코로나19 확진자 정보 공개 범위를 명확히 정하거나 정보 공개 전 확진자의 확인을 거치는 방식으로 절차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중앙방역대책본부장)이 질병관리본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경기도 구리시 등 각 지방자치단체가 원칙을 깨고 질본과 별도로 관할 구역의 확진자 이동 경로나 접촉자 현황 등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감염 불안감으로 인한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면서다. 통일된 지침이 없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 각 지자체의 정보 공개 범위나 방법은 제각각이다. 심지어 부정확한 정보가 기재되기도 한다.
서울의 확진자 A 씨는 구청의 동선 공개로 곤란을 겪었다. 해당 구청이 애초 공개한 A 씨의 이동 동선에는 심리상담소에서 오후 내내 머물렀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A 씨가 이의를 제기한 뒤에야 구청은 오후 내내가 아닌 1시간 정도만 머물렀다고 수정했다. 그런데 신천지가 심리상담을 빌미로 포교를 하고 있는 터라 심리상담소에 A 씨가 오후 내내 머문 것을 두고 지역 맘카페에서 신천지 의혹이 불거졌다. A 씨가 방문한 심리상담소는 신천지와 무관한 곳으로 알려졌다. 구청이 1시간가량 머문 것을 오후 내내 머물렀다며 부정확한 동선을 발표하지만 않았다면 불거지지 않았을 논란이다.
시민들은 코로나19 감염보다 감염된 뒤 정보 공개에 더 큰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2월 둘째 주에 대구 출장을 다녀온 뒤 미열 증상을 겪어 선별진료소에 검체 검사를 받으러 갔던 일요신문 기자도 “감염보다 동선 공개가 무서웠다. 서울에 돌아와서 시내를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녀서 확진을 받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관련기사 대구 출장 기자 코로나19 선별진료소 검사 직접 받아보니).
감염 우려와 함께 동선 공개 공포로 여행 등의 바깥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는 사람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 중구에 사는 정 아무개 씨(29)는 주말이면 여자친구와 호텔에서 휴식을 즐기는 호캉스를 떠났지만 최근 이를 자제한다. 정 씨는 “혹시 감염돼서 동선이 공개되면 비난이 쏟아질 것 같다. 호캉스도, 여행도 다 취소했다. 어지간하면 술도 집에서 마시려고 한다”고 답했다.
이동 경로, 접촉자 현황 등 정보는 공유되는 게 감염 확산을 차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국민 건강과 관련하지 않은 정보 공개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역 전문가인 박찬병 서울시립서북병원장은 “정보 공유는 방역에 꼭 필요하다. 질본은 투명하고 신속하게 잘 대처하고 있지만 시민들이 알 필요가 없는 정보까지 공개한 부분도 있다”며 “가령 ‘처제와 밥을 먹었다’고 공개할 이유는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난 뒤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 일”이라고 설명했다.
명성교회 부목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뒤 명성교회 방역이 이뤄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어 박 원장은 “감염 확진자는 이동 경로를 잘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역학조사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며 “정보 공개 전에 환자의 동의 혹은 확인을 거치는 과정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확진자 정보 공개 근거가 되는 감염병예방법 34조의 2는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메르스 사태 때는 현재와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박근혜 정부는 메르스에 감염된 의사가 있었던 삼성서울병원을 감싸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시민들 불안이 증폭되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5년 6월 4일 심야 기자회견을 열어 “메르스에 감염된 삼성서울병원 의사가 개포동 주공아파트 재건축 총회 등에 참석해 시민 1500여 명과 접촉했다”고 밝혔다.
질본의 발표로 피해를 입은 환자가 추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여지도 있다. 소송이 진행되면 질본이 공개한 정보가 국민 건강에 관련된 정보인지 아닌지가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법무법인 현재 김가람 변호사는 “감염병예방법과 공중보건 위험소통 표준운영절차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들이 감염병 예방을 위해 알아야 하는 정보를 신속히 공개하게 했지만 모호한 부분이 있다. 지금이라도 시행규칙, 지침 등에서 공개 대상 정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환자 신원이 특정됐거나 특정되지 않았더라도 국민이 알아야 할 정보보다 과도한 정보 공개로 가정불화가 생기는 등 피해를 봤다면 추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확진자 정보 공개가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알고 있다”면서도 “현재까진 공개 범위를 규정하는 지침을 질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자체에 지침을 전달하지도 않았다. 현재로선 지침을 만들 계획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어렵다”고 답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