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iting’ ‘All kill’ 등 한국식 용어 그대로 사용…해외 팬들이 ‘신조어’ 만들기도
해외 팬덤을 대상으로 한 ‘최고의 보이그룹 막내’ 투표. 사진=유튜브 캡처
해외 팬들이 한국 팬 용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다. 걸그룹 소녀시대, 보이그룹 2PM과 샤이니, EXO가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아이돌의 예능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던 때다. 소녀시대는 KBS 2TV ‘청춘불패’에 고정 출연한 써니와 유리의 케미가, 2PM은 MBC every1의 ‘아이돌 군단의 떴다 그녀 시즌 3’과 Mnet ‘와일드바니’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해외 팬덤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부 해외에 불법으로 풀린 이들의 예능 방송이 외국어 자막을 달고 초기 유튜브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해외의 K팝 팬들에게 한국식 팬 용어를 알렸다.
예컨대 2020년 현재까지도 해외 팬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막내 온 탑(Maknae On Top)’ 역시 한국 아이돌 예능을 통해서 유행됐다. ‘막내 온 탑’이란 팀의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멤버들을 휘어잡는 이른바 ‘실세 멤버’를 가리킨다. 막내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콩글리시’가 된 한국식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셈이다.
‘Fighting’의 한국식 발음인 ‘화이팅’도 해외 팬덤이 즐겨 쓰는 팬 용어다. 사진=트위터 캡처
이 같은 예는 다른 용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Fighting(파이팅)’을 한국식으로 읽은 ‘Hwaiting(화이팅)’도 해외 팬들이 자주 쓰는 용어다. 음원 차트의 상위권을 모두 점령했을 때 쓰는 ‘All kill(올 킬)’과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가리키는 ‘Killing Part(킬링 파트)’ 등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해외 팬덤은 더 다양한 한글과 영어를 적절하게 혼합해 새로운 팬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듣보(듣도 보도 못함)’로 불리는 비인기 아이돌을 가리키는 ‘Nugu Group(누구 그룹)’이 그 예다. 이 같은 신조어는 2016년부터 해외 팬덤에서 만들어져 사용돼 왔다. 당초 한국 용어와 같은 ‘듣보’를 사용하려 했으나 영문으로 치기가 어려운 점, 한국어를 잘 알지 못하는 해외 팬들이 그 뜻을 바로 알아 챌 수 없다는 점에서 ‘Who’를 뜻하는 한국말 ‘누구’를 그대로 차용해 해외 팬덤만의 용어를 만들어낸 셈이다.
해외 팬덤 내에서 ‘Nugu Group’과 관련해 종종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진=구글 검색 화면 캡처
특히 이 용어는 2020년 현재까지도 해외 팬덤 내에서 그 활용법을 가지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어 흥미롭다.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만큼 “현재 활동하고 있는 아이돌 가운데 어느 그룹부터 ‘Nugu Group’으로 분류할 수 있느냐”는 토론 주제가 열리면 해외 팬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종종 라이벌 아이돌 팬덤 사이에선 상대 그룹을 조롱할 때 “너희는 이미 Nugu Group이 됐다”고 비꼬는 식으로 사용된다.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한 활발한 용어 교류로, 국내 인터넷 문화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이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인터넷 용어들도 이미 해외 팬덤엔 일상어가 됐다.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신조어 ‘고답이’도 해외에서 그대로 ‘Godabi’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처음엔 팬덤 용어가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사용되던 신조어였으나 국내 아이돌 팬들의 SNS 등에서 활발하게 쓰이면서 자연스럽게 해외 팬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됐다. 같은 예로 ‘입덕(어떤 장르에 흥미를 갖고 마니아가 되다)’과 ‘탈덕(흥미를 가졌던 장르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다)’ 등의 인터넷 용어도 그대로 해외 팬덤에 녹아들었다. ‘Ipdeok’ ‘Taldeok’으로 쓰이는 이 용어들은 해외 아이돌 팬들의 SNS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외 팬덤 내 ‘한국 팬 용어’의 정착으로 연예기획사들의 일손이 덜어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연예 홍보 담당자는 “옛날에는 한국식 속어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뜻이 잘 맞을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냥 한국말 그대로 적어도 해외 팬들이 바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굳이 정식 자막을 만들지 않더라도 국내 팬들이 직접 해외 자막을 만들거나 한국말을 수준급으로 하는 해외 팬들과 국내 팬들 간 교류를 통해 쉽게 정보 전달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돌들의 말실수 등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단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앞의 담당자는 “해외 쪽 영상에 말실수가 담겨 있어도 자막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제는 해외 팬들도 한국식 속어나 욕, 해서는 안 될 말 같은 걸 바로바로 아니까 그런 부분을 더 면밀하게 잡아내고 방지하는 것도 일이다”며 “국내 팬덤에선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해외에선 문제가 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세심하게 살피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