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공급·합작사 설립 등 시나리오 거론…“경쟁사 비해 늦어, 협력 폭 더 넓혀야”
현재 세계 자동차 시장은 전기차 확산에 따라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기존 내연기관차의 핵심인 엔진 기술의 가치는 낮아지는 대신 전기차의 심장 역할을 하는 배터리 기술 가치는 수직 상승 중이다. 이 배터리는 대부분 배터리 제조사들이 만든다. 일부 완성차 업체들도 기술 개발과 생산을 병행하고 있지만 배터리 제조사들의 기술력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들 배터리 제조사는 납품업체나 협력업체 수준을 넘어 시장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차와 같은 완성차 제조사 입장에선 배터리 제조사들이 경쟁 상대이자 동시에 필수 협력업체다.
이 때문에 최근 수년 사이 해외 자동차 업계와 배터리 업계에선 ‘적극적인 동맹’이 트렌드처럼 자리 잡고 있다. 다만 현대차와 삼성은 지금까지 관련 산업에서 교류가 없었다. 각각 다른 업체들과 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번 회동으로 삼성과 현대차가 세계적 흐름에 맞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이번 두 총수 회동의 ‘오작교’ 역할을 한 것은 삼성이 개발한 ‘전고체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는 최근 세계 배터리 제조사들이 앞다퉈 개발을 집중하고 있는 분야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리튬이온 배터리셀’의 단점을 개선한 것이 특징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가 높고 수시로 충전할 수 있지만 온도가 과도하게 높아지거나 충격을 받으면 액체 전해질이 흘러내려 폭발할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전기차의 핵심 경쟁력인 최대 주행거리가 짧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바꿨다. 안정성도 높고 크기도 더 작게 만들 수 있는 데다, 최대 주행거리가 휘발유, 경유를 가득 채웠을 때와 비슷한 800㎞를 웃돈다. 충전시간도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짧다. 이 때문에 전고체 배터리는 현재 전기차 시장에서 ‘게임체인저’ 또는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아직까지는 세계적으로 양산에 성공한 제조사는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최근 깜짝 회동을 가졌다. 사진은 2019년 1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그랜드홀에서 열린신년회에 참석해 이야기 나누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삼성과 현대차가 얻는 것
협력이 가시화되면 삼성은 배터리 계열사인 삼성SDI를 중심으로, 세계 전기차 판매량 4위인 현대차를 강력한 우군으로 확보하게 된다. 그동안 삼성SDI는 다른 배터리 제조사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생산기지를 늘려갈 때,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기술 개발에 집중했고 내놓은 성과물 중 하나가 전고체 배터리다. 삼성SDI는 올해 1분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줄고 부채가 늘었다. 그러나 증권가에선 삼성SDI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도 배터리 분야 투자에 대한 기대감이다.
삼성이 미래 자동차 시장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분야는 배터리 외에도 3~4가지가 더 있다. 전장부품과 센서, 자동차용 반도체 등이다. 이 가운데 삼성이 가장 큰 강점을 가진 차량용 반도체가 배터리와 함께 현대차 협업 비즈니스 모델에 포함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2019년 4월엔 테슬라, 5월엔 아우디에 공급을 시작했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개발 경쟁이 붙은 자율주행차에는 각종 네트워크 장비와 기술에 대한 수요가 높다”며 “반도체가 주력인 삼성으로선 자율주행차 개발에 적극적인 현대차와의 협업을 하게 되면 시장 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삼성과 협업을 통해 안정적인 배터리 공급망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동안 LG화학의 배터리를 주로 써오다가, 내년 초 생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전기차 탑재 배터리 공급사로 SK이노베이션을 선정했다. 배터리 공급망이 넓어지면 리스크도 줄고 수급 안정성은 올라간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세계 시장에 총 44종의 친환경차를 내놓고 56만 대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가운데 순수 전기차는 총 23종이다. 배터리 공급망 다각화는 현대차 입장에선 필수인 셈이다. 삼성SDI까지 가세하면 현대차의 차세대 배터리 확보 루트는 더욱 공고해진다.
삼성과 현대차의 합작사 설립도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꼽힌다. 배터리 공급 안정화와 동시에 자체 기술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이다. 현대차는 자체적으로도 전기차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지만 기술력이 필요한 배터리에 대해서는 배터리 제조사들과 공동 개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세계 완성차 업체들도 합작사를 설립하는 추세다. GM은 LG화학과 미국 오하이오에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고 폴크스바겐은 스웨덴 노스볼트와, 도요타는 파나소닉과 손을 잡았다. 정부 지원 여부와 규모도 관심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시스템 반도체와 바이오헬스, 미래차를 3대 신성장 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삼성과 현대차 총수들의 만남은 대통령 연설 사흘 뒤에 이뤄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구상하는 정책(한국판 뉴딜)에 드라이브가 걸릴 것”이라며 “미래차 분야는 물론 여러 산업 분야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밑 협상은 진행…”협력 폭 더 넓혀야“
당초 삼성과 현대차의 협력은 이른 시일 내에 이뤄지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지금까지 삼성의 배터리가 현대차에 공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현대차는 현재 파우치형 배터리를 쓰고 있고, 삼성은 각형, 원통형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어 호환이 되지 않는다. 현대차가 이미 기존 거래처인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으로부터 약 5년간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 받을 계획을 세워둔 점도 이 관측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삼성과 현대차는 총수 회동 전부터 협력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가 만든 차량에 삼성SDI의 각형 배터리 탑재하는 방식으로 기술 검토 이상의 단계까지 개발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삼성과 현대차는 아직까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두 회사 관계자는 “협력과 관련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현재로선 어느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의 전고체 배터리 양산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현재 배터리 업계에서 국내 업체들의 전고체 배터리 양산은 올해 기준으로 약 9~1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차세대 배터리의 대안이 전고체 배터리만 있는 건 아니다. 리튬금속, 리튬황전지 등 가능성이 열려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자동차와 배터리 업계에선 “삼성과 현대차 협력을 올해 결정하더라도 이미 한참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도요타는 오는 2022년 전고체 배터리 자동차를 출시할 계획을 밝혔다. 협력 분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른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한 발 늦은 만큼 눈앞의 전기차뿐만 아니라 수소연료전지 등 협력의 폭을 더 크게 늘리는 게 장기적으로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