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위기 속 삼성 역할’ 강조 여론전…대형 M&A와 준법경영 행보 주목
기소의 타당성을 검찰이 아닌 외부 위원에게서 판단 받게 해달라는 이재용 부회장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찰시민위원회는 지난 6월 11일 부의심의위원회를 열어 이 부회장 사건을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 사건에 대한 기소 여부와 수사 계속 여부는 이르면 오는 6월 말께 검찰 수사심의위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된다.
구속실질심사에 이어 검찰과의 맞대결에서 또 다시 판정승을 거둔 모양새지만, 이재용 부회장에게 유리한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법조계 안팎에선 부의심의위가 검찰과 이 부회장 측의 주장이 팽팽한 상황에서 최종 판단의 공을 수사심의위로 넘겼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기각된 구속영장을 두고서도 검찰과 이 부회장 측의 해석은 크게 엇갈린다. 검찰은 구속영장이 기각됐지만 재판의 필요성은 법원도 인정했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 부회장 측은 검찰이 주장하는 범죄 혐의가 제대로 소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관련기사 벼랑 끝 ‘여론전’ 성공? 삼성 이재용 영장 기각 막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근 검찰과의 두 번의 맞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임준선 기자
이재용 부회장의 ‘우세’ 분위기가 앞으로도 이어질지도 미지수다. 향후 열릴 수사심의위는 법조계와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등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수사심의위에선 검찰과 이 부회장 측의 구두 의견 진술도 허용되고 질의도 가능해 보다 심층적인 논의가 이뤄진다.
수사심의위의 권고안은 강제력이 없다. 불기소 권고가 나오더라도 검찰이 기소를 강행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반대로 복잡한 회계 사건이 중심인데, 수사심의위가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 부회장은 불법 경영 승계 의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도 진행 중이다. 대법원에선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의 형량을 원심대로 확정했다. 대법원이 최 씨에 대한 형량을 확정하면서 이번 불법 승계 의혹 사건에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이 부회장의 ‘사법리스크’는 앞으로 수년간은 더 이어질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 측이 혐의 부인 주장과 함께 내세운 최대 무기는 ‘삼성 역할론’이었다.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은 이례적으로 지난 6월 5일부터 3일 연속으로 검찰 수사 내용과 관련한 언론보도에 해명자료를 냈다.
특히 7일엔 ‘언론인 여러분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냈는데 “삼성의 위기”로 시작해 “삼성의 경영이 정상화되어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 “한국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삼성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의혹을 해명하면서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삼성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로선 검찰이 수사심의위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기소는 미룰 가능성이 높다. 과거 수사심의위에 참여했던 복수의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사안이 중대할수록 결론이 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이번 사건은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 사이 이재용 부회장 측과 삼성은 ‘한국 경제 회복을 위한 삼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역할론’을 더욱 부각할 것으로 관측된다.
가장 관심이 쏠리는 부문은 삼성의 투자 행보다. 금융투자업계에선 삼성이 앞으로 투자와 연구개발에 큰돈을 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5월 6일 대국민 입장발표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신사업에 과감히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달 18일 중국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미래에 대비한 투자’를 강조했다. 이후 삼성은 약 18조 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의 대표적인 사업이 반도체다. 남은 건 신사업인데, 이를 위해 대형 M&A(인수·합병)가 단행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올해 세계적인 코로나19 사태로 기업들이 자금난을 겪고 기업 가치가 떨어지면서 실탄이 두둑한 기업에는 기회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삼성은 올해 1분기 기준 총차입금을 제외하고 순현금이 97조 원에 달한다. 그동안 삼성은 2017년 자동차 전장업체 하만 인수(9조 4000억 원) 이후 중소형 M&A만 단행해왔다.
수사심의위의 권고안은 강제력이 없어 불기소 권고가 나오더라도 검찰이 기소를 강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울중앙지검. 사진=박정훈 기자
최근 증권가에선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 이후 일제히 삼성전자의 전망치를 올려 잡고 있다. 경영 위기가 일부 해소됐다는 취지다. 올해 2분기와 3분기 실적도 지난 1분기 때와 비교해 비슷하거나 더 높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투자여력과 실적 전망치는 삼성이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역할’을 언급할 때 핵심 근거로 쓰인다.
준법경영 약속 이행 여부는 ‘신뢰 회복’을 위한 삼성의 강력한 무기로 통한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경영 승계 논란, 노사 문제 등에 대해 사과하고 노동3권 보장, 시민사회와의 소통 강화 등을 약속했다. 이후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의 고공 농성 해제 합의 등 일부 약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준법경영 방안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어 실효성 있는 책임 이행 방안을 내놔야 하는 건 숙제다.
변수도 있다. 최근 금융당국은 삼성을 비롯해 금융사를 소유한 대기업을 겨냥한 금융그룹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금융위원회는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대통령 재가 등을 거쳐 오는 9월 정기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이 법안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재벌 개혁의 하나로 주장해온 내용이 담겨있다. 계열사의 부실이 고객의 돈이 모인 금융부문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지만, 삼성의 경우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계류됐다가 소멸된 일명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도 21대 국회에서 재추진될 가능성이 나온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대부분을 팔아야 한다. 삼성생명이 가진 주식을 삼성 계열사들이 가져오지 않으면 이 부회장의 지배력이 흔들리게 되는데,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현재로선 복안이 없는 상황이다(관련기사 못 풀면 잘라야? ‘고르디아스 매듭’ 삼성 지배구조 개편에 쏠리는 시선).
재계 한 관계자는 “삼성 역할론은 과거 사법리스크가 불거질 때마다 삼성이 일관되게 내세웠던 전략”이라며 “다만 최근의 삼성 경영 현안은 쉽게 풀어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아 불확실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