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펀치’ 별명 때문에 다들 오해…치우치지 않는 ‘조화’의 바둑 추구해요”
6월 LG배 본선에서 대국 중인 원성진. 16강에서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구쯔하오를 꺾었다. 사진=사이버오로
그런데 프로기사 원성진은 리듬이 다르다. 20대 후반에 세계대회에서 첫 우승, 오히려 30대 중반 들어선 펄펄 난다. 늦게 피었기에 긴 생명력을 가지는 걸까? 작년엔 국내 대회 우승만큼 어려운 농심신라면배 선발전을 뚫더니 올해 열린 LG배 16강에선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구쯔하오를 꺾었다. 국가대표팀 자체리그에선 어린 후배들에게 묵직한 펀치를 선사한다. 원성진은 85년생, 98년에 입단했다. 제16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구리를 2-1로 꺾었던 때가 2011년이었다. 이창호가 22년 만에 무관으로 추락한 해다. 박정환이 후지쓰배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며 기지개를 켰었다. ‘소띠 동갑’ 최철한·박영훈과 이세돌 등이 이미 국내외 무대를 종횡무진하던 백가쟁명의 시절이다. 이때부터 대기만성(大器晩成), 우보천리(牛步千里) 같은 사자성어가 그에게 따라 붙었다.
2011년 12월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구리를 2-1로 꺾고 우승한 원성진. 사진=사이버오로
“바둑 공부가 옛날보다 더 재미있어요.” 6월 하순 장맛비가 내리는 오후, 한국기원 근처에서 만난 원성진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공부방법은 단순해요. 바둑을 두고, 인공지능으로 수순을 찍어봐요.” 마치 수험생처럼 문제를 풀고 정답지로 확인하는 식의 공부를 무한 반복한다. “AI 착점마다 이유를 분석하는 기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들고 사실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저완 안 맞아요. 그냥 (AI로) 가능한 한 많이 찍어보고, 익히다 보면 어떤 감이 생겨요. 인공지능 수법이 제 몸에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스며든다’라는 말이 깊게 와 닿았다.
원성진의 별명은 ‘원펀치’다. 느리고 두텁게 두며 버티다가 상대의 약점을 노려 살인펀치 한방으로 쓰러뜨리는 스타일 덕분이다. 사진=사이버오로
요즘 다시 성적이 좋은 이유를 묻자 “그건 착시현상입니다. LG배와 국대리그에서 좀 괜찮은 거 빼곤 없어요. 기대감이 많이 떨어지니까 생각보단 잘한다고 느끼시는 거죠. 꺾일 때가 되었는데 반전이 있으니…”라면서 웃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세계대회 4강에 오르고, 바둑리그에서 100승을 넘기는 등 꾸준하게 성적을 냈다. 예전부터 LG배에선 성적이 좋았다. 오는 11월 열릴 8강에서 만날 상대는 중국랭킹 1위 커제 9단이다. “예전부터 아주 높게 평가했던 기사다. 재능 자체가 뛰어났고, 고정관념을 깨는 자유분방함이 있다.” 한국기사 중에서 유사한 스타일이 있냐고 묻자 “박정환, 신진서와는 결이 다르고, 이세돌과 약간 비슷한 면은 있지만 같지는 않다”라고 한다.
가볍고 자유롭게 두는 건 차라리 전성기 시절 조훈현과 더 가깝다는 평이다. “커제와 상대전적은 2승 3패다. 실력차이에 비해선 좋은 성적이다. 2년 전 LG배 32강에서 만났을 때는 커제 스타일을 의식해서 작전을 짜고 들어가서 어렵게 이겼다. 이번 8강도 고민해봐야겠다.”
별명은 ‘원펀치’다. 느리고 두텁게 두며 버티다가 상대의 약점을 노려 살인펀치 한방으로 쓰러뜨리는 스타일 덕분이다. 원성진은 “별명 때문에 다들 오해하시는데 제 바둑이 모두 그런 내용은 아니에요. 입단 초기에는 두텁고 발이 느려서 그 두터움을 좋아했죠. 실력이 늘어가면서 바둑관도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중간을 유지하고 있어요. 원래 치우치는 걸 싫어합니다. 기풍은 성격과 닮게 마련인데 전 극단적인 기풍이 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원성진은 마지막으로 오청원 선생을 말했다. “‘바둑은 조화다’가 가장 통찰력이 있는 말입니다. 정답은 상황에 따라 달라요. 바둑을 잘 두려면 절대로 한쪽으로 치우쳐선 안 됩니다.”
[AI가 바꾼 패러다임] “지금은 맛을 아끼지 않아” 제16회 삼성화재배 결승 3국(2011.12.07) ●원성진 9단 ○구리 9단 장면도 #장면도 ‘실전 진행’ 흑9까지 흘러가는 초반진행은 당시는 숨도 쉬지 않고 두어진 정형이었다. 지금은 전혀 볼 수 없는 ‘옛날 바둑’이다. 당시 관전기에는 흑15를 두고 ‘원성진의 두터운 기풍을 엿볼 수 있는 수’라고 썼다. 하지만 현재 원성진은 “수법들이 많이 바뀌었다. 흑15는 이젠 없는 수다. 백34로 잇는 수도 말이 안 된다”라고 단언한다. 예전에 ‘후수성 선수’라고 부르며 묘한 느낌을 주던 수법들은 이젠 대부분 발이 느린 수로 평가된다. 우상귀 모양은 백34가 아니라 A마늘모 자리로 지키는 게 추세다. 참고도 #참고도 ‘AI가 주는 지침’ AI가 초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발 빠르게 활용하고 선수를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약간 손해라도 먼저 모양을 결정짓는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인공지능이 주는 지침이다. 원성진은 “10년 전 초반은 현재 기준으로 보면 너무 느리다. 지금은 맛을 아끼지 않는다. 실전 백34로는 참고도 백2, 4처럼 실리를 챙기면서 귀를 지키는 방법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과거 ‘아마추어나 두던 수’라고 선생님에게 혼났던 수법이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