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파기 책임 소재 진실공방…제주항공 ‘규모의 경제’ 물거품 “좀 더 신중했어야”
지난 7월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애경 본사 앞에서 열린 ‘이스타항공 노동자 8차 총력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정부의 적극 해결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저주는 피했어도 승자는 아니다
“지난 3월 계약 때부터 회사가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바뀌자 말을 바꾸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인수주체로서 경영 개입도 부인하기 어렵다. 가슴팍까지 차올라 있던 물을 셧다운(운항중단) 때문에 머리끝까지 올라오게 한 것 아니냐.” 이스타항공 고위 관계자는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 포기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지난 3월 셧다운 이후 매출 ‘제로’ 상태가 이어졌으나 제주항공이 인수를 지연하며 자력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경영난이 악화됐다는 설명이다.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은 인수 과정에서 경영 개입 여부를 두고 진실공방을 벌이는 중이다. 이스타항공 조종사노동조합은 지난 7월 6일 양사 경영진의 회의록과 대화 녹취록을 공개하며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 셧다운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제주항공은 다음날인 7일 입장문을 통해 “양사 간 협의를 통해 이뤄진 조치를 마치 일방적 지시처럼 매도한 것은 도와주려던 의도를 왜곡한 것”이라며 국내선을 운영할수록 적자가 늘어나는 상황을 고려해 조언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스타 측의 각종 의혹은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 지분 인수에 따라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라며 “지난 1일 10영업일 이내에 선행조건 해소를 요구했고, 이행되지 않을 경우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제주항공이 ‘신뢰 훼손’ ‘명예 실추’ 등의 표현으로 불쾌감을 표하자 관련 업계에서는 사실상 M&A 파기를 선언한 것으로 해석했다. 제주항공은 지난 7월 23일 이스타항공 주식매매계약 해제를 공시했다.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다. 양사가 계약 파기 책임 소재를 두고 여전히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공방은 추후 법적 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높다. 앞서의 이스타항공 관계자는 “제주항공에서 이행보증금 반환 소송 등을 진행하면 그에 대응하기 위해 검토 중”이라며 “(법적분쟁 시) 그간 공개하지 않은 근거자료들을 제출할 것”이라고 전했다.
미지급금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제주항공 측은 부인하지만, 지난 3월 SPA(주식매매계약) 체결 이후 발생한 미지급금을 제주항공이 책임지기로 한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다”며 “앞서 이석주 대표(현 AK홀딩스 대표이사)가 이스타홀딩스 측에 미지급금을 부담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 바 있다. 계약상 책임 주체가 이스타 측이었다면 이행을 요구했지 부탁이나 요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재계에서는 이스타항공이 파산해 1600여 명의 실직자가 생기게 될 경우 제주항공이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제주항공의 인수 지연이나 포기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라면서도 “인수·합병의 목적은 결국 경쟁사를 제거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도의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이어 “사업면허권을 쥐고 있는 정부의 중재 노력을 반한 데 따른 부담도 안게 됐다”고 덧붙였다.
#기대모았던 제주항공 이제는 계륵?
재계에서는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 포기가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제주항공마저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스타항공을 떠안기에는 부담이 큰 데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업황 개선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교수는 “제주항공은 이스타항공 인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항공 또한 70%가 휴직 중인데다 항공기 45대 가운데 10대만 운영 중인 상황”이라며 “코로나19 여파로 환경이 달라졌고 여파가 추후 2~3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 사태가 마무리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항공 수요가 30%가량 줄어들 것으로 관측된다”고 설명했다.
제주항공이 이 같은 상황에 몰리면서 항공산업을 그룹의 주요 사업으로 전진 배치하려던 애경그룹의 전략도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애경그룹은 지난해 11월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참여하며 제주항공의 체급을 키우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 이스타항공 인수가 진행 중이던 지난 5월에는 비정기 사장단 인사를 단행해 제주항공과 애경산업을 중심으로 위기경영체제를 가동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러나 제주항공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이스타항공 인수까지 포기하면서 ‘규모의 경제’는 물거품이 됐다. 성장 동력은커녕 이제는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1분기 영업손실 657억 2647만 원을 기록한 제주항공은 최근 15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준비하고 있다. 자금조달의 목적은 채무상환자금(1178억 원)과 운영자금(406억 6428만 원) 마련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황용식 세종대 경제학부 교수는 “제주항공의 M&A는 전략적 목표와 재무적 목표가 어긋난 경우다. 제조업에서 주로 규모의 경제 전략을 쓴다”며 “시장지배력을 키우려 했다는 점에서 방향은 바람직했으나 의사결정자와 경영자가 실사과정 등에서 성급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주항공은 호황기를 잘 타 급성장했고, 규모의 경제를 목표로 삼았으나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며 “(이미 부실한 상태였던) 이스타항공 인수 판에 들어온 것 자체가 제주항공의 실수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인수 포기와 그에 따른 잡음으로 제주항공이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은 향후 사업 확대에도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스타항공 관련 후폭풍을 최소화해야 하는 숙제을 받은 셈이다. 황용식 교수는 “코로나19 사태가 지나가면 항공사 매물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제주항공 또한 M&A를 시도해볼 수 있겠지만 이스타항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