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자가 수용자 감시, 약 먹이고 온몸 묶어 두들겨 패, 날마다 죽어나가…“비상상고심서 박 원장 무죄판결 바로잡히길”
10월 1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1호 법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비상상고심이 열렸다. 법정 왼쪽 벽에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강신우 씨(58)가 1987년 작성한 진정서가 화면에 커다랗게 띄워졌다. 이윽고 피해자 참고인으로 출석한 박준영 변호사가 “피해자의 호소는 지성인의 죽음과 달리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인간의 권리는 평등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방청석에 앉은 강 씨가 슬며시 눈을 비볐다.
#아내 잃은 남편이 한 순간에 부랑인으로
무고한 시민들은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형제복지원에 수용되곤 했다. 사진=형제복지원운영자료집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18-1, 형제복지원은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해운대로 이어지는 길에 위치한 복지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버스회사와 용당국민학교가 있었다. 파출소는 복지원에서 가장 가까운 관공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복지원을 자유롭게 드나들지는 못했다. 육중한 철문은 피해자를 실은 트럭이 들어올 때에만 가끔씩 열렸다. 높고 단단한 철문 너머에는 12년 동안 불법 감금·강제노역·학대·성폭행·살인 등 믿기 힘든 인권유린이 벌어졌다.
2만 2545㎡(약 6820평) 규모의 복지원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학교, 식당, 방송실, 교회, 공장과 병원까지. 복지원은 그야말로 작은 사회였다. 특히 수용자들이 직접 지은 한마음교회는 인근에서 가장 크기로 명성이 자자해 다른 교회의 목사들이 견학을 올 정도라고 했다. 개금분교라는 학교도 있었으나 형식적으로 운영될 뿐, 그곳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간혹 외부 인사들이 현장 관리를 올 때에만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아이들이 동원되곤 했다. 박 원장 일가는 언덕 위 사택에서 따로 지내며 수용자들을 감시했다.
복지원 수용자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복지원 안에서도 부산에 부랑인이 이렇게 많은지 믿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75년 12월 516명이던 수용자는 816명, 1111명, 1325명, 1293명, 1221명, 1713명, 1985명, 2525명, 2861명, 3011명으로 매년 증가했다. 1986년 말에는 수용자가 3128명에 달했다.
무고한 시민들은 부랑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이들을 복지원으로 이끈 사람들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가족에 의해, 또 누군가는 생면부지 타인에 의해 복지원에 오게 됐다. “좋은 곳에 가자”며 형제복지원으로 데려온 경찰과 종교인도 적지 않았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20대 청년과 30대 직장인도 문서 한 장이면 부랑인이 됐다. 실제로 올해 5월 부산시가 발간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생과 시설생활자를 제외한 수용자들의 9.3%는 형제복지원 수용 전 서비스직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4.1%는 기술직, 35.2%는 단순 노무직 종사자로 절반이 넘는 인원이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일반 시민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강신우 씨가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최희주 기자
피해생존자 강신우 씨도 20대 초반을 형제복지원에서 보냈다. 1984~1987년, 3년의 시간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지난 10월 24일 일요신문은 부산에 위치한 강 씨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강 씨는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늘어놓았다.
“경찰이던 아버지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고,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 15세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1984년 7월 19일 23세에 복지원에 가게 됐어요. 사고로 아내를 잃고 매일같이 술만 마시던 시기였는데, 보름 정도 되니까 집 주인이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기도를 해 주겠다’며 산 속에 있던 기도원에 데려갔어요. 그곳에서 며칠을 있었는데 어느 날, 전도사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마음교회라고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기도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따라 갔더니 그곳이 형제복지원이었던 거예요.”
이때부터 2년 8개월, 햇수로는 3년의 악몽이 시작됐다. 그는 형제복지원을 “교도소와 군대를 합친 동물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가족이 있다”는 말도 소용없었다. 관리자는 막무가내로 강 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몸수색을 마친 뒤, 파란색 운동복을 내밀었다. 가슴팍에는 수용자 번호가 붙어 있었다. 교도소에서나 볼 수 있는 복장이었다.
복지원에서는 수용자 숙소를 소대라고 불렀다. 강 씨는 신입소대에 배치됐다. 형제복지원에 들어오는 모든 수용자는 신입소대를 거친 후 정식 소대로 배치된다고 했다. 내부는 군대 내무반과 다를 것 없는 구조였다. 작은 철제 침대가 다닥다닥 놓여 있었다. 소대 창문은 쇠창살로 항상 가로막혀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했다.
일반 소대 외에 A동, B동, C동으로 불리는 곳도 있었는데 정신질환자, 장애인 등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C동은 형제복지원 관할이었으나 A, B동은 민간에서 내는 병원비로 운영되는 정신요양병동이었다. 정신질환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들어오거나 가족들이 보낸 환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의 경우 돈까지 내고 형제복지원에서 살았던 셈이다. 강 씨는 노동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2년 5개월 동안 B동에 수용됐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민간병원 의사가 나더러 기질성 뇌증후군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직까지 그 의사 이름하고 병원 이름을 기억해요. 너무 억울해서…. 그 뒤로 계속 약을 줬는데 우리는 그걸 씨피젯트라고 불렀어요. 성분은 몰라요. 근데 한 번 먹으면 8시간은 몽롱하고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약을 먹었어요. 안 먹겠다고 거부해도 코를 막고 억지로 약을 삼키게 했거든요. 2년 넘게 그 독한 약을 먹으니 위가 다 고장이 날 수밖에 없죠.”
#복지원 지키는 경비도 수용자
형제복지원 가구반 수용자들이 노역을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임금을 받은 이는 0.8%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형제복지원운영자료집
국내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 한때 3000명이 넘는 수용자가 살았던 형제복지원은 놀랍게도 단 10명의 정식 직원들로 운영됐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1987년 형제복지원 수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복지원 직원은 원장 박인근과 총무, 목공, 노무원, 운전사, 보모 4명 등이었다. 수천 명의 수용자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지도원은 임 아무개 씨 1명으로 총 10명의 직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도원 1명이 3000여 명의 수용자를 문제없이 관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수용자들 사이에 계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방 경비대 출신의 박인근 원장은 형제복지원을 군대처럼 운영했다. 복지원 체제에 비교적 순종적인 수용자에게 완장을 주고 같은 수용자를 관리하도록 했다. 조장, 반장, 실장, 소대장, 중대장으로 이어지는 계급은 복지원 운영을 더욱 기형적으로 만들었다.
지옥 같은 복지원에서 완장은 일반 수용자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었다. “복지원 직원은 원장하고 원장 아들 포함해서 10~12명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마저도 대부분 원장의 친인척이었고…. 수용자 관리는 거의 수용자들이 했어요. 소대랑 복지원 주변을 지키는 경비도 수용자 중에서 뽑았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었죠.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도 처음에는 피해자였을 텐데 거기 있다 보니 또 다른 가해자가 된 거죠. 폭행, 살인 등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거기서는 정말 많이 일어났어요”라고 증언했다.
“일명 우주복이라고, 한여름에 비옷 같은 것을 입히고 온몸을 꽁꽁 묶은 후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리는 건데, 누구든지 말을 안 들으면 우주복을 입혔어요. 거꾸로 매달아 놓고 꽁꽁 묶어 때리는 것도 일상이었고, 밥을 늦게 먹거나 세수를 늦게 마치는 3명은 무조건 박달나무 몽둥이로 손바닥을 맞았어요. 폭행 정도는 점점 더 심해졌는데 소대에서 누구 한 명이 실수를 하면 조장이랑 반장은 소대장한테, 소대장은 중대장한테 맞았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도 실수를 못하게 매일 때렸던 거예요. 도망가는 사람이 나오면 관리 부실이라고 근신 처분되는 소대장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일반 수용자 신분으로 돌아갔어요. 자기 꼬붕(부하)이었던 애들한테 맞고, 밥도 이전처럼 많이 못 먹거든요. 다시 소대장이 되려면 반장, 조장을 또 해야 하고…. 그게 싫으니까 더 악을 쓰고 사람들을 잡았던 거죠.”
강 씨 역시 1985년 6월 소대장인 조 아무개 씨와 실장 강 아무개, 김 아무개, 안 아무개 씨 등으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일요일 오전 옥상에서 청소를 하고 일어서던 중 벽에 매달아 둔 조화를 떨어뜨렸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강 씨를 엎드리게 한 뒤 양팔을 발목과 함께 묶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박달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타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구타 끝에 결국 그는 기절해 일주일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해운대 모래사장을 누비며 커피와 아이스께끼를 팔던 건강한 청년은 없었다. 왼팔과 왼다리는 그의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매 맞는 도중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크게 찧은 탓이었다. 복지원 퇴소 이후 다섯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그는 여전히 자유롭게 걷지 못한다. 구타 후유증으로 인한 뇌경색까지 겹친 탓이다.
“가족이 있으면 보내준다고 하니까 그 안에서 몇 번이나 편지를 썼는지 몰라요.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내고 처음 며칠은 일도 하고 그랬어요. 어차피 좀 있으면 나갈 거니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감감무소식이야. 그 뒤로 몇 번이나 편지를 써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런데 병원을 옮기고 나서는 5일도 안되어서 가족들이 편지를 받았다고 나를 찾으러 온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복지원에서는 편지를 보내주지도 않았어요.”
1987년 이후 박 원장의 왕국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울주군 작업장에서의 강제노역을 하는 수용자들을 발견한 김용원 전 검사가 박 원장을 감금과 횡령 혐의로 조사하면서부터다. 더 이상 복지원 내 요양병원 운영이 어렵게 되자 이곳에 갇혀있던 환자 대부분은 가족에게 인계되거나 인근 병원으로 전원됐다.
강 씨 역시 1987년 2월 구덕 대남병원으로 이송된 이후에서야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아홉 살 터울의 17세 동생과 열한 살 터울의 15세 동생은 어느새 강 씨 대신 가장이 되어 있었다. 동생들은 절룩거리는 그를 보며 “우리 형, 오빠가 왜 이렇게 됐느냐”며 오열했다.
24일 찾은 강 씨의 집 곳곳에는 그의 신념을 드러내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진=최희주 기자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아버지였다. 경찰 출신의 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아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렸다.
“몸도 불편하신 아버지가 친구 차까지 빌려와서는 변호사를 만나러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어요.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찾아갔는데 두 분이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겠다며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옹호위원회를 연결해줬어요. 그분들 말씀대로 내가 겪은 일, 느낀 점을 써서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에게 보냈더니 김 전 검사가 한 번 보자며 불렀어요.”
강 씨의 진정서가 중요한 이유는 강 씨가 목격한 동료들의 죽음과 이름, 정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데 있다. 사실 복지원 내에서는 수용자들을 이름이 아닌 별명이나 번호로 불렀던 탓에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함께 생활하는 수용자가 많았다. 그러나 강 씨는 자신이 입은 피해 말고도 주변인들의 피해까지도 상세히 적어 문서로 남겼다. 이에 대해 박준영 변호사는 “강 씨의 진정서에는 사망한 동료는 물론 가해자의 이름이 명확하게 나와 있고, 구타 방법과 정황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강 씨의 진정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죽는 사람은 계속 있었습니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가 하면 육교에서 떨어져 반신불구가 된 채 목숨만 간신히 붙어사는 전 아무개, 저와 마찬가지로 폭행을 당해 한쪽 발을 못 쓰는 정 아무개, 관리자의 관리 소홀로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이 아무개, 폭행으로 사망한 양 아무개, 수건으로 목을 졸라 사망한 김 아무개 등 정말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이곳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곳은 요양원이 아니라 생지옥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아직 형제원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1989년 법원은 내무부 훈령 410호를 근거로 박 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형제복지원 운영은 공적 업무였으니 위법하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과거 판결이 위법임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비상상고심만을 기다리고 있다. 강 씨가 눈물로 눌러 쓴 진정서는 30여 년이 흐른 2020년 법정에서 다시 한 번 낭독됐다. 이번에는 피해생존자 40여 명과 함께였다.
“한때는 몸이 성치 않으니 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복지원 때문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어요. 퇴소하고 나서는 통영에서 1년 동안 꽃게잡이 배를 탔고, 불편한 다리를 끌고 공장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중국에서 사업도 했고요. 지옥 같은 형제복지원도 버텼는데 어지간한 힘든 일은 그때 생각하면 다 잊어버릴 수 있거든요. 지금은 비상상고심 결과가 제대로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강 씨는 “무슨 일이든 의지만 있으면 돼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힘 써준 사람들이 많으니 잘될 겁니다”라며 웃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