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소송비 투입에 한국 기업 이미지 저하 우려…계열사 강대강 기조에 총수 간 해결도 난망
4대그룹 총수의 회동은 알려진 것만 따져도 지난 9월에 이어 두 번째다. 이날 모임의 취지는 축하와 위로였지만 경제계 안건 논의도 빠뜨리진 않았다고 한다. 이날 모임에서는 현 정부 및 여당의 기업규제법안 도입, 미국 대선에 따른 국내 경제계 영향, 최태원 회장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추대 등이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4대그룹 총수 간 회동에 대한 시선은 긍정적인 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모임이 정례화될 가능성이 있다. 선대와 달리 회장들끼리 직접 소통하면서 한국 경제에도 긍정적인 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의 배터리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그룹 총수가 나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8년 남북정상회담 환영 만찬에 참석한 모습.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자주 만나면서도 그 얘긴 왜 안 꺼낼까
재계 관계자들이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총수들끼리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도 왜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배터리 소송에는 개입하지 않는지 여부다. 4대그룹 총수의 맏형인 1960년생 최태원 회장과 1978년생 막내 구광모 회장은 나이 18세나 차이가 나지만, 격의 없이 의논할 수 있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결정권자인 총수가 나서면 평행선을 달리는 배터리 소송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 정치권부터 재계 원로들까지 재계 2, 3위 그룹인 SK와 LG의 ‘추태’에 대해 자제하라는 권고가 잇따르고 있다. 주변에서 소송전에 총수가 개입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이 소송이 부르는 후폭풍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화해하는 것만이 ‘윈윈’인 셈이다.
두 기업의 배터리 전쟁은 세기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이라 할 만하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직원들을 불법채용해 기업 비밀을 빼돌렸다면서 LG화학이 제기한 이 소송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영업비밀 침해(특허 침해) 여부를 따지고 있다. 이 결과를 놓고 손해배상 소송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손해배상 소송 규모는 최소 1조 원대로 추정된다. 심지어 LG화학 측은 “1조 원대가 아니다. 우리의 피해액이 너무 크기 때문에 최소 수조 원 단위일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2차전지(배터리)는 에너지 전환 패러다임을 놓고 보면 아주 중요한 영역이다. 석탄과 석유를 쓰지 않으려면 배터리를 비롯한 에너지저장장치가 더 발전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으로 전기를 만들든 수소로 만들든 전기를 저장해둘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고 하는 것처럼 배터리를 ‘미래 산업의 쌀’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땅한 차세대 먹거리가 없는 한국 경제에 있어 마지막 남은 보루로 인식될 정도다. 관계자들이 “제발 화해하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양측은 소송전으로 이미 큰 손실을 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ITC 결정이 ‘완전 패소’로 나올 경우 배터리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어 소송이 제기된 이후 수주가 잘되지 않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주에 26억 달러 투자 및 2000여 명 고용을 약속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이행하지 못할 수 있다. 이 경우 미 정부의 싸늘한 눈초리가 내전을 벌인 한국 기업들에게로 향할지 모른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SK의 미국 사업이 차질 없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이유다.
천문학적인 소송비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요인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양측은 현재까지만 4000억 원 이상의 소송비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송이 지연될수록 소송비 또한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룹 차원의 감정싸움은 이를 넘어서는 손실을 가져오고 있다. 양측은 대기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비방전을 펼치고 있다. 한 대기업 홍보실 관계자는 “양측이 마타도어 수준의 중상모략에 나서고 있다. 솔직히 좀 자제했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소재 LG트윈타워(왼쪽)와 서울 종로구 SK본사. 사진=박은숙 기자·연합뉴스
# 화해 안 하나 못 하나
하지만 총수가 나선다고 해서 중재가 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단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영업비밀 침해는 전혀 없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증거 인멸로 예비판결에서 조기패소를 받긴 했지만, 직원들이 주의하자는 차원에서 ‘L문서(LG가 거론된 자료)’를 지웠을 뿐 영업비밀 침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SK는 그러면서 영업비밀 침해가 맞는다면 어느 부분을 침해했는지 명확히 밝히라고 반박하고 있다.
김준 사장 등이 강하게 나오면서 최태원 회장으로서는 먼저 나서 화해를 권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국내 경제계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는 최 회장 입장에서는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가 사실이라는 판정이 나왔을 경우 어느 정도 타격이 불가피하지만, 계열사 사장이 적극 반박하는 상황에서 중재에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LG화학은 대화의 테이블에 앉을 수는 있다는 입장이다. 정당한 수준으로 합의금을 제안한다면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LG 또한 구광모 회장이 직접 나서지는 않고 있다. 이에 대해 LG 관계자는 “이번 사안은 주주, 투자자, 해외거래선 등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관련돼 있는 이슈로, 총수가 아닌 LG화학 경영진이 나서는 게 맞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총대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권영수 LG 부회장이 매고 있다. 두 사람은 지식재산권 보호 이슈와 관련해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이다. 특히 신학철 부회장은 승소를 자신 있어 한다. 승소한다면 받아낼 수 있는 합의금 또한 훨씬 커지기 때문에 공세의 수위를 높이는 것이다. LG화학이 앞서 배터리 소송전을 통해 재미를 본 것도 자신감을 갖는 배경 중 하나다. LG화학은 2017년 10월 미국 법원에 중국의 ATL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냈다. 애플 아이폰의 배터리 공급사로 유명한 ATL은 안전성 강화 분리막(SRS)의 LG화학 특허를 인정하고 2019년 3월 합의를 마무리했다.
한편 최종 판결은 두 차례 연기돼 12월 10일 나올 예정이나 더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 ITC가 최근 SK이노베이션의 사업 파트너인 포드, 폭스바겐과의 인터뷰 녹취록을 제출하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는 없었으며 패소 판결을 내린다면 미국 경제와 소비자들에게도 피해가 간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ITC가 녹취록 자료를 살펴보면 최종 결과 발표가 더 늦어질 수 있다”고 했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