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부진 속 노동자 사망 등 악재 이어지자 사장 승진 일단 연기…일각 “불확실성 정리되면 전면 나설 것”
현대중공업그룹이 장기간 이어온 전문경영인 체제를 끝내고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을 축으로 오너경영인 체제 전환에 나선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오른쪽)과 아들 정기선 부사장이 올 3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제사가 치러지는 서울 종로구 정 명예회장의 옛 자택으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일요신문DB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최근 현대중공업지주가 발족한 미래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아 인공지능(AI), 바이오, 수소·에너지 등 3대 신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계열사 덩치 키우기에도 한창이다. 현대중공업지주·KDB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은 지난 11월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본입찰에 참여해 10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인수 성사 시 현대건설기계와 합쳐 국내 1위이자 글로벌 5위 업체로 도약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신사업 등에서 본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며 실적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봤다.
사실 승계 과정은 진즉에 밟았다. 정기선 부사장은 2009년 대리로 현대중공업에 입사했지만 직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은 뒤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2013년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재입사한 뒤 2014년 상무, 2015년 전무로 승진했다. 특히 2017년 부사장 승진과 함께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 현대중공업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 현대중공업지주 경영지원실장, 3개직을 겸직한 부분은 눈여겨볼 지점.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세 포지션은 정기선 부사장을 회장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라며 “지주사 부사장으로 신사업을 이끌고, 선박해양영업본부와 글로벌서비스 대표로서 고객인 외국계 선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기선 부사장이 올해 활발한 신사업과 인수합병(M&A)으로 광폭 행보를 보이면서 재계에서는 올 연말 그가 사장으로 승진할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지난 11월 연말 정기인사에서 정기선 부사장의 승진은 없었다. 실적 부진과 대우조선해양 M&A 등 불확실성에 기술탈취 의혹 등 잡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승진을 의도적으로 미뤘다는 의견이 많다.
우선 그룹 뼈대인 조선업 실적이 부진하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실적이 반영된 한국조선해양의 올해 9월 말 매출과 순이익은 11조 3299억 원, 883억 원으로 작년 동기보다 매출은 4.5% 늘었으나 순이익은 63.1% 줄었다. 작년 미·중 무역 분쟁에 따른 물동량 감소 여파에 올해 코로나19에 따른 실물경기 침체가 더해지면서 수익성이 떨어졌다. 코로나19로 대면 업무에 차질을 빚으며 수주도 줄었다.
다른 주력사업 현대오일뱅크 상황도 마찬가지다. 올해 9월 말 연결기준 매출은 10조 2960억 원으로 작년 9월 말(15조 7646억 원)보다 34.7% 줄었다. 같은 기준으로 영업손실은 5147억 원, 순손실은 4291억 원으로 작년 4130억 원, 1909억 원에서 적자 전환했다.
M&A 불확실성도 여전하다. 현대중공업은 작년 대우조선해양 인수 계약을 체결해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와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카자흐스탄 싱가포르 등 6개 국가에 기업결합 심사를 신청했다. 현재까지 카자흐스탄과 싱가포르 승인만 받은 상태로, EU는 코로나19 등을 이유로 올해 기업결합심사를 세 번이나 유예해 내년으로 미뤄질 전망이다. 양사 결합 시 LNG선 기준 시장점유율이 50%를 넘기에 독과점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제동이 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이 밖에도 현대중공업에서 올해만 노동자 4명이 사망했고, 협력업체 기술탈취와 차기 구축함(KDDX) 개발사업 관련 군사기밀 유출 의혹 등 악재가 잇따르며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재계 관계자는 “본업 실적이 워낙 안 좋고 대우조선해양 M&A도 계속 연기됐으며 사망사고 등 불확실성과 악재가 상존했다”며 “그 와중에 승진하면 그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고, 사장이 되면 각종 이슈에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커지기에 미룬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이 최근 신사업 광폭 행보를 이어가며 실적 쌓기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 근로자 사망사고 등 악재가 터지면서 승계가 미뤄지는 모양새다. 전국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5월 청와대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일요신문DB
아직 두각을 나타낸 사업을 꼽기 힘든 점도 이유다. 급성장하는 현대글로벌서비스도 실질적으로는 정기선 부사장의 성과라 보긴 어렵다는 평가다. 2018년 현대글로벌서비스의 계열사 내부거래 매출액은 전체 매출의 약 35%로 나타난 바 있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그룹 내 일감을 맡으며 성장해온 만큼 본인 실적이라 보기 어렵다”며 “현 전문경영인을 방패막이로 두고 불확실성과 잡음이 정리가 되면 정기선 부사장이 맡은 신사업과 계열사들 실적에 따라 시기를 조절해 경영 전면에 나설 것”이라고 관측했다.
일각에서는 부친의 지주사 지분 승계를 위해 현대중공업지주와 중간지주사 한국조선해양을 합병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정기선 부사장의 현대중공업지주 지분은 5.26%에 그친다. 승계를 마무리하려면 부친 정몽준 이사장으로부터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26.6%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정기선 부사장의 현 수입원은 급여와 현대중공업지주 배당금이 전부다.
박주근 대표는 “현대중공업지주와 한국조선해양을 합친 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등 중공업 계열사가 직접 배당하는 것을 오너 일가가 받을 수 있도록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며 “이후 부친 지분을 증여받은 뒤 배당금을 증여세 재원으로 쓸 수 있다”고 내다봤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미래위원회는 각 계열사에서 파견된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팀으로, 신사업 아이디어 발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정기선 부사장은 경영지원실장이니만큼 위원장을 맡아 그룹 신사업 육성을 담당하는 것“이라며 ”최근 인사는 회사 경영과 내부 정책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현대글로벌서비스 내부거래와 관련해서는 “실제 벌어들이는 이익 90% 이상이 국내외 선주사에서 발생하는 구조로, 앞으로 더 투명한 공정거래원칙에 따라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