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만 목표량의 25% 이상 따내…전문경영인 중심 구조, 연말 인사 시즌 발표 효과 극대화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전경. 사진=연합뉴스
연말 대규모 수주는 조선업계의 관행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임원 중심의 문화 때문에 나타나는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조선 3사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기업과 달리 업계 전체적으로 전문 경영인 체제가 자리잡혀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26.6%를 보유한 ‘총수’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 정치권에 오래 있었고, 대우조선해양은 대우그룹 붕괴 이후 산업은행 체제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이끌었다. 삼성중공업은 삼성그룹 계열사지만 비주력 계열사로 분류되는 탓에 대표이사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런 특수성과 함께 수익성을 계산하기 힘든 선박 계약의 복잡성, 계약 파트너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밀폐성 등으로 최종 의사결정권이 있는 임원들이 연말 인사 시즌에 맞춰 최종 사인을 내리길 반복하다 보니 ‘한국 조선사는 1년 내내 조용히 지내다가 연말에만 일감을 따온다’는 인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경향을 해외의 선주들도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 조선사 관계자는 “연중 고르게 수주해야 작업 계획을 짜는 데도 좋다. 몰아치기 수주 또한 개선해야 할 사항”이라고 꼬집었다.
#빅3 연말 몰아치기 수주…매해 반복된다
최근 조선 3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주 계약을 발표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 계열 한국조선해양은 파나마 지역 선사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3척을 수주했다고 지난 12월 22일 공시했다. 계약 규모는 6072억 원이다. 앞서 한국조선해양은 같은 달 21일에도 유럽과 오세아니아, 파나마 지역 선사로부터 각각 컨테이너선 4척과 LNG운반선 3척을 수주했다고 밝혔다. 상반기 목표 달성률이 13.8%밖에 되지 않았던 한국조선해양은 22일 기준 수주 달성률을 86%까지 끌어올렸다.
삼성중공업도 지난 12월 23일 아프리카 지역 선사로부터 LNG운반선 4척을 수주했다고 밝혔다. 금액으로는 8150억 원 규모다. 22일에도 4000억 원대 수주 계약을 발표했다. 삼성중공업은 아직 수주 달성률이 65%로 갈 길이 꽤 남아 있지만, 그래도 상반기 달성률이 6%에 그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선전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대우조선해양이 같은 달 3일과 11일 각각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LPG운반선 1척 수주를 발표했다. 대우조선해양 역시 상반기 20%를 밑돌았던 수주 달성률을 75%까지 끌어올렸다. 국내 조선사들은 12월 들어서만 3조 1000억 원의 수주고를 올렸는데, 2020년 수주 목표치 110억 달러(약 12조 2000억 원) 가운데 25% 이상을 12월에 따냈다.
연말 몰아치기 수주는 매해 반복되고 있다. 2019년에도 한국조선해양은 상반기 수주 달성률이 16.8%에 불과했으나 연말 76.7%까지 끌어올렸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도 상반기 각각 41.0%, 33.2%였던 수주 달성률이 연말엔 91.0%, 81.9%까지 올랐다. 2018년에는 현대중공업이 3사 중 유일하게 목표치를 달성(100.8%)했는데, 당시도 상반기 달성률은 38%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도 하반기 수주 달성률이 48.8%, 49.2%로 상반기(28%, 44%)에 비해 높았다.
한국 조선사들의 이 같은 패턴은 분명 눈에 띈다. 글로벌 선주들의 발주 자체가 하반기에 더 많긴 하지만 이를 고려해도 하반기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영국의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 전체 선박 발주량은 1026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였고, 하반기는 1503CGT였다. 하반기 발주량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60%는 안 됐다.
2020년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라는 특수성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반기 총 발주량이 전년의 70% 수준인 697만CGT는 됐다. 7~11월 발주량이 750만CGT였다는 점을 보면 아무리 코로나 사태가 있었다고 해도 상반기 내내 한국 조선사들이 ‘개점휴업’을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상반기 조선 3사의 수주량이 대폭 줄어 중국에 역전됐다가 하반기 이후 한국이 재역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9년에도 상반기 국내 조선업계 전체 수주실적은 358만CGT로 중국의 468만CGT에 못 미쳤지만, 하반기에는 585만CGT의 수주를 따내면서 중국(387만CGT)을 제치고 다시 1위를 차지했다.
#예정된 물량, 끌어오는 일 반복…이유는?
업계 전문가들은 연말 몰아치기 수주에 대해 한국의 인사 문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 조선사 관계자는 “좋은 일감을 확보해놓고 발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연말에 발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또 반대로 이듬해 상반기로 예정돼 있던 발주 물량을 무리해서 끌어오곤 한다”면서 “연말에 몰아치기 수주를 하면 일단 회사 분위기가 좋아지고, 그 영향이 인사 평가에 반영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대부분 선진국이 수시로 인사를 하는 것에 비해 한국은 연말 정기 인사를 실시한다. 이는 일본의 영향이다. 그러나 일본도 12월 결산법인과 3월 결산법인이 나뉘어 있어 한국만큼 연말에 한 번에 인사를 실시하진 않는다는 것이 일본 재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연말에 동시에 임원 인사를 실시하고, 빅3 간 경쟁마저 치열하기 때문에 매해 연말마다 대거 수주가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조선사의 계약은 계약 당시에 수익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도 일부 임원들의 연말 몰아치기 작업에 이용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수주 계약의 수익성이 원자재 가격과 환율, 국제유가 등에 따라 출렁이다 보니 임원들이 최종 계약 시점을 늦추거나 당기기 용이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따내는 일감인 만큼 연말에 몰아서 하면 어떠냐는 반박이 나올 순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고르게 일감을 수주하는 것이 현장 관리에 용이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연말에 계약을 확정 짓는 것이 반복되다 보면 상대방이 이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듬해 상반기 예정됐던 물량을 가져올 때는 당연히 가격을 낮춰줘야 한다.
한 조선사 관계자는 “2010년 이후 조선사들이 저가 수주했던 해양플랜트 물량도 상당 부분이 연말 체결된 계약이었다”면서 “조선업계처럼 수주 달성률을 경마 중계식으로 발표하는 업종은 없다. 빅3 간 과열 경쟁이 너무 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