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시헌-허경민 등번호 대물림…엄정욱-윤희상 제2 야구인생 동행…구대성-류현진-김진욱 체인지업 계보 이어질까
한화 윤규진(사진)은 자신의 야구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선수로 정민철 단장을 꼽았다. 사진=연합뉴스
#윤규진 초·중·고 선배 정민철 단장
18년간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윤규진은 올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고, 2021년부터 한화 전력분석원으로 새출발하게 된다. 한화가 2020시즌을 마치고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는 상황에서 윤규진은 은퇴하기 전 이미 구단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보직이 전력분석원으로 결정 난 것이다.
윤규진은 자신의 야구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선수로 정민철 단장을 꼽았다. 정민철 단장은 윤규진의 초·중·고 선배다. 윤규진은 신인 시절 선배 정민철과 룸메이트가 되면서 야구 인생의 목표를 ‘투수 정민철 닮기’로 잡았다고 한다.
“당시 선배였던 정민철 단장님이랑 한 방을 사용하는 게 꿈만 같았다. 롤 모델이었던 선수와 한 공간에 누워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나는 언제쯤 저 선배처럼 공을 던져보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선수 생활하면서 글러브, 스파이크, 옷 등을 직접 사본 적이 없었다. 단장님이 다 챙겨주셨다. 하얀색 운동복이 갈색이 될 때까지 입고 다녔고, 글러브도 단장님이 주신 것만 사용했다. 야구는 당연하고, 야구 외적인 부분까지 모두 다 닮고 싶었다.”
윤규진은 정민철 단장의 배려로 그의 등번호 55번을 물려받기도 했다.
“단장님이 일본 요미우리에서 복귀해 55번을 달다 23번으로 바꾸셨는데 55번 등번호를 내게 물려주시더라. 심지어 다른 선배가 그 번호를 가져가려고 했을 때 규진이 달게 해주라고 말씀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코치로 다시 만났을 때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실망을 안겨드리기도 했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이 난 적도 있는데 직접 코치님한테 야구를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모르고 야구했던 기억이 있다.”
두산 내야수 허경민(사진)은 손시헌을 롤 모델로 삼고 선수생활에 임해왔다. 사진=연합뉴스
#‘우상’ 손시헌과 같은 방 쓴 허경민
최근 원 소속팀인 두산 베어스와 7년 85억 원(처음 4년간 계약금 25억 원, 연봉 40억 원 등 총 65억 원, 이후 3년간 20억 원의 ‘선수 옵션’ 조항)의 FA(자유계약)를 맺은 허경민. 그는 어렸을 때부터 베어스의 손시헌 야구를 보며 성장했다고 말한다. 광주가 고향인 허경민은 손시헌이 광주로 원정 경기를 오면 사진을 들고 야구장으로 달려가 사인을 받았을 정도다.
허경민이 손시헌의 야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중학생 때 키가 작아 야구 선수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다. 마침 손시헌이 프로에서 뛰고 있었고, 프로팀에 들어가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던 허경민으로선 손시헌의 활약에 큰 자극과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었다.
광주일고 1학년 때부터 주전 유격수로 활약한 허경민은 당시 오지환, 안치홍, 김상수, 이학주 등과 함께 ‘고교 5대 유격수’로 꼽혔다. 허경민은 2008년 세계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대표팀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허경민은 고향팀 KIA 타이거즈의 지명을 기대했지만 2009년 신인 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두산에 입단, 자신의 우상인 손시헌과 만나게 된다.
“두산의 지명을 받고 팀에 합류하면서 손시헌 선배를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손시헌 선배와 같은 방을 쓰면서 선배의 모든 걸 직접 보고 배웠다. 평소 우상이라고 생각했던 선배와 함께 생활한 부분은 내 야구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허경민은 NC 다이노스로 이적한 손시헌의 등번호인 13번을 물려받았다. 손시헌도 두산에서 자신의 등번호를 물려받은 이가 허경민이란 사실에 반색했다는 후문.
“손시헌 선배님 등번호를 달고 뛰고 있을 때 하루는 관중석에서 등번호 13번을 들고 환호를 보내는 팬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아는 척을 하려 했다가 그 13번 유니폼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손시헌 선배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순간 ‘더 노력해서 손시헌 선배보다 유명해져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었다.”
허경민은 FA 계약을 앞두고 NC 코치로 있는 손시헌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선배의 조언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배님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지금은 다른 팀 코치로 계시지만 선배님이 내 야구인생의 롤 모델이자 멘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파이어볼러’ 엄정욱에 푹 빠진 윤희상
올 시즌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은퇴식을 치른 SK 와이번스 투수 윤희상의 롤 모델은 선배 엄정욱이었다. SK 입단하면서 당시 ‘파이어볼러’의 대명사였던 엄정욱의 강속구에 푹 빠졌던 그는 엄정욱을 닮고 싶다는 생각에 모든 걸 따라했다고 말한다.
“어릴 때는 스피드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다른 형들은 상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엄)정욱이 형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 이후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야구장 가면 형의 모든 걸 따라하고 흉내 냈다. 그렇게 하다보면 형처럼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공인 160km/h를 찍는 형의 구속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내 일기장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이 형은 괴물이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나도 던지고 싶다. 매일매일 강하게 던진다. 어깨야 버텨줘 제발’이라고 말이다.”
윤희상은 은퇴 후 자신의 롤 모델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다. 엄정욱이 운영하는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정욱이 형이 나를 스카우트하셨다. 형의 제안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고, 지금 아카데미에서 어린 선수들, 엘리트 선수들을 돌봐주고 있는데 야구할 때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류현진의 롤 모델은 한화 출신 대선배 구대성이다. 사진=연합뉴스
#류현진의 체인지업 스승은 구대성
‘99번’은 류현진을 상징하는 등번호다. 하지만 류현진이 처음부터 99번을 단 건 아니다. 한화 이글스에서 류현진은 첫 등번호로 15번을 달았다. 팀 선배인 구대성이 뉴욕 메츠로 떠나기 전 사용했던 등번호였다. 그러다 구대성이 한화로 복귀하면서 15번을 내주고 99번을 달았다. 99번은 한화의 마지막 우승인 1999년을 의미하기도 했다.
류현진은 한화 시절 롤 모델로 구대성을 꼽았다. 일본과 미국에서 뛰다 복귀한 구대성이 서클체인지업 그립을 알려줬고, 류현진은 영리하게 그 구종을 자신의 주무기로 삼았다.
“내가 한화 유니폼을 입던 해에 구대성 선배님이 팀에 복귀하셨다. 선배님이 등판할 때마다 그분의 체인지업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하면 체인지업을 배울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 찾아가선 체인지업을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고, 선배님은 흔쾌히 자신의 체인지업을 전수해주셨다. 선배님 덕분에 나한테 맞는 체인지업을 완성시켰고, 체인지업 덕분에 지금까지 야구선수로 많은 걸 이룰 수 있었다. 만약 그 체인지업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 진출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류현진은 2014년 호주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전을 앞두고 호주 시드니 크리켓구장에서 구대성을 직접 만난 상황을 떠올렸다. 1969년생인 구대성은 당시 호주 프로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메이저리그 선수와 그걸 전수해준 대선배의 만남은 류현진한테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아 있다.
#김진욱 “류현진 체인지업 장착할 것”
2020 신인 드래프트 2차 1순위로 롯데 지명을 받은 강릉고 투수 출신의 김진욱은 인터뷰 때마다 “류현진 선배가 내 롤 모델”이라고 밝혔다. 그가 류현진을 롤 모델로 꼽은 이유는 바로 체인지업. 류현진이 구대성한테 체인지업을 배웠듯이 그도 류현진으로부터 체인지업을 배우고 싶은 바람이 있다.
“류현진 선배님이 등판하는 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시청했던 것 같다. 선배님의 투구를 보면서 특유의 포커페이스와 위기관리 능력을 보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프로 데뷔를 앞두고 커브와 체인지업을 연습 중인데 아직은 주무기로 정착시키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김진욱은 기회가 된다면 류현진을 직접 만나 체인지업과 투수의 마인드 컨트롤, 경기 운영 관련해서 조언을 듣고 싶다고 말한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