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충격적” 한목소리…김성근 “한국야구 왜 이렇게 됐나” 윤희상 “‘인천=SK’ 없어진다니…”
SK 매각 소식은 남아 있는 선수들한테도 충격이었겠지만 SK를 떠난 감독 코치 은퇴 선수들한테도 놀라운 뉴스였다. 일요신문은 ‘SK 왕조 시대’의 주역들로 꼽히는 이들과 인터뷰를 통해 SK 선수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상황과 관련해 솔직한 생각을 들여다봤다.
김성근 전 감독은 SK 매각에 대해 “슬프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 김성근
지난 1월 중순 출국 후 현재 일본에서 자가격리 중인 김성근 전 감독(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 어드바이저)은 SK 와이번스 매각에 대해 “슬프고 충격적인 소식”이라고 말했다.
“SK 구단 매각 소식은 일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일본 야구인들도 놀라워하면서 내게 연락해왔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는 왜 한국 야구가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가 세상 사람들한테 더 이상 흥밋거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김 전 감독은 반면에 SK 야구단을 인수해준 신세계그룹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는 말도 했다.
“SK가 재정난으로 팀을 매각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SK를 인수해준 신세계그룹이 고마웠다. 제대로 된 기업에서 선수단 전체를 인수해줬고, 잘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김 전 감독이 이토록 마음 아파하는 이유는 그의 지도자 인생에서 SK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2006년 말 SK 사령탑에 올라 한국시리즈 3차례 우승(2007·2008·2010년)과 준우승(2009년)을 이끈 김 전 감독은 당시 ‘SK 왕조’를 일구며 신드롬을 형성했다. 물론 많은 훈련량과 혹사 논란으로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만 김 전 감독의 제자들이 KBO리그에서 정상급 선수로 우뚝 서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선수들한테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공교롭게 김 전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의 해체도 지켜봤다. 그는 쌍방울과 SK 시절의 ‘감독 김성근’을 이렇게 표현했다.
“쌍방울 시절에는 내가 감독으로서 야구를 배울 수 있었고, SK 때는 우승이란 목표를 세우고 정열을 쏟았던 시기다. 세상과 처음으로 우승을 약속하고 감독직에 올랐다는 점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팀이다. 더욱이 SK 감독 부임 당시 명예퇴직당해 거리로 나선 이들이 많았다. 나름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야구를 통해 뭔가 메시지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쌍방울에서는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선수들을 몰아세웠다면 SK에서는 선수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데 집중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두 팀의 공통점이라면 사람은, 선수들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슬픔은 즐거움의 시작이다. SK와 인연을 맺었고, 맺고 있는 이들한테 SK의 퇴장은 슬픔이지만 이 위기를 기회로 삼고 선수들이 야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 전 감독은 KBO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돈을 많이 받는 선수들은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 프로는 기술이다. 팬들은 선수들의 기술을 보러 야구장을 찾는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그에 걸맞은 기술적인 향상을 이뤘느냐 하는 걸 짚어보자. 돈은 많이 받고 싶고, 사명감 의무감을 소홀히 하는 선수라면 프로의 자격이 없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수들이 ‘나’만 생각하면 SK가 사라지듯이 프로야구도 사라질 수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KBO 총재부터 구단 사장들, 선수단 모두 각성하고 의식과 태도 노력 열정 등에서 대변화를 이뤄야 한다. 구단 운영은 기업이 이끌어갈 수 있지만, 야구는 우리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근우
2005년 2차 1라운드 7순위로 SK 입단 후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 날쌘 수비로 KBO리그 대표 2루수로 성장했던 정근우. SK 시절 정근우는 2006년, 2009년, 2013년 3차례나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을 수상했을 만큼 ‘SK 왕조’의 철옹성을 구축했다. FA(자유계약)를 통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 후 지난 시즌을 LG 트윈스에서 2루수로 활약한 다음 은퇴 수순을 밟은 그는 SK 매각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고 말한다.
“구단 매각이 이토록 빠르게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많이 섭섭하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선수단이 그대로 인수된다는 점이다. 구단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SK가 쌓아 올린 역사와 전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남아 있는 선수들이 잘 이어 받아서 신세계그룹과 새로운 역사를 잘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정근우한테 SK는 ‘친정팀’이다. 그는 “친정팀이 사라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라면서 “은퇴한 선수들보다 현재 남아 있는 선수들이 더 걱정인데 환경에 동요되지 말고 야구에 전념해주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재상
박재상 전 코치는 프로 입단 후 선수, 코치까지 SK와 20여 년을 함께한 ‘SK맨’이다. 박 전 코치도 SK 매각 소식에 깜짝 놀랐다는 소감을 전했다.
“신세계그룹이 SK 선수단을 그대로 인수했다고 해도 와이번스의 역사는 중단되는 게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지난 시즌까지 SK에서 코치로 선수들과 동고동락했던 터라 지금 선수들이 어떤 마음으로 훈련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래서 더 싱숭생숭해졌던 것 같다.”
박 전 코치는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선수들도 스프링캠프 앞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훈련에 임할 수 있게 됐으니 우왕좌왕하기보다 훈련에 열정을 쏟아야만 한다. 그래야 개막했을 때 인천 팬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지 않겠나. 프로는 성적으로 말해야 한다. 선수들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조용히 응원하고 싶다.”
SK 와이번스 마지막 선발투수로 남게 된 윤희상은 “SK가 매각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윤희상
2020년 10월 30일 LG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던 윤희상은 그 경기가 은퇴식을 겸한 자리였지만 기록으로는 SK 와이번스 마지막 선발 투수로 이름이 남게 됐다. 은퇴 후 유소년 야구 지도와 글러브 판매 사업을 시작한 윤희상은 처음 SK가 신세계그룹에 인수된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했다가 확정됐다는 뉴스에 “엄청 서운했다”고 말한다.
“다른 팀은 매각돼도 SK는 매각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처음 뉴스를 접하고 선수들, 감독, 코치들, 프런트 관계자들 걱정이 되더라. 나는 이미 은퇴해서 팀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이 컸겠나. 특히 선수들은 아마 ‘멘붕’이었을 것이다.”
윤희상은 다른 건 몰라도 ‘와이번스’라는 팀명은 남아 있길 바랐다.
“내가 신인이었을 때만 해도 SK 연고지 팬들이 거의 없었다. 빈 관중석을 채우려고 군인들, 초등학생들을 초청해서 경기를 치렀을 정도다. 그 초등학생들이 성장하면서 연고지인 인천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게 됐고, SK 열혈 팬들이 됐다. 또 다른 의미에서 가슴 아픈 건 내 딸과 아들이 커서 초등학생이 됐을 때 아빠가 뛰었던 SK라는 팀은 이미 사라져 있을 거란 사실이다. 구단 관계자들부터 모든 분들이 노력해서 ‘인천=SK’를 만들었는데 그게 없어진다는 게 정말 슬프다. 해태 타이거즈가 KIA 타이거즈로 바뀌었듯 SK라는 이름은 사라져도 와이번스는 남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도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윤희상은 후배들이 뛰고 있는 ‘친정팀’을 진심으로 응원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아 있는 선수들이 잘 추스르고 일어서 팀을 제대로 이끌어가길 바란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엄정욱
2000년 2차 2라운드 9순위에 쌍방울 레이더스 지명을 받았지만 신인 지명권이 SK에 넘어가면서 프로 생활을 SK에서 시작했던 엄정욱 베이스볼 아카데미 대표. 2000년부터 2015년 은퇴할 때까지 KBO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진 선수로 기록된 그는 최고 구속이 공인 시속 158km, 비공인 160km였다.
부상으로 일찍 은퇴 수순을 밟은 엄정욱은 은퇴 후 과일 가게에서 일을 하는 등 사회생활의 부침을 겪다가 3년 전 인천 지역에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열고 유소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SK 와이번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관련해서 담담히 이런 심경을 밝혔다
“나중에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감독님 어느 팀 나왔어요?’라고 물었을 때 ‘SK 출신이다’라고 말하면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걸 떠올리면 가슴이 무척 시리다. 청보 핀토스나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현존하지 않는 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