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 대규모 자금 확보 불가피…현대차,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공급 늘려 ‘눈길’
LG엔솔과 SK이노의 합의금에 대한 견해차는 크다. LG엔솔의 요구액은 2조~3조 원이고, SK이노는 1조 원 미만을 원하고 있다는 게 복수의 배터리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동안 SK이노가 패소하면 미국 배터리 사업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만큼 판결이 나오면 곧바로 협상에 속도를 붙일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일각에선 무리하더라도 LG엔솔의 요구 수준을 맞출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서울 여의도 LG그룹 본사(왼쪽)와 종로구 SK그룹 본사. 사진=연합뉴스
예상과 달리 최근 SK이노는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ITC(미국 국제무역위원회) 판결에 대한 거부권 행사 기한이 40일가량 남았고, SK이노가 앞서 수주한 폴크스바겐·포드 공급 물량은 2년, 4년씩 수출금지 유예를 받은 만큼 이 기간 동안 현재 미국 공장을 가동하면서 장기 협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SK이노는 ITC 판결 이후 낸 입장문을 통해 “언제든 협상에 임할 것”이라며 원칙적으로 합의 의사를 밝혔지만 “남아 있는 절차(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검토 등)로 ITC 결정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후반전이 남았다’는 취지의 뜻을 밝혔다. LG엔솔이 요구하는 합의금 규모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이 SK이노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배터리업계 공통적 관측이다. 미국 대통령이 ITC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하려면 ‘공익적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앞서의 폴크스바겐·포드가 새 배터리 업체를 찾기 위한 시간을 벌게 된 만큼 미국에는 실질적인 피해가 없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사례도 지금까지 단 1건뿐이다. 항소 절차도 남아 있지만 ITC 결정이 연방항소법원에서 뒤집힌 사례는 2010년 이후 지금까지 한 차례도 없다. LG엔솔도 “합의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배상금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며 “시간을 끌면 SK이노가 더 손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SK이노가 여유를 보이는 이유를 업계는 LG엔솔의 배터리가 탑재된 현대자동차 전기차에서 잇달아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두고 양측 책임 공방이 벌어진 상황에서 찾는다. 소송전에서 패소했지만 2~4년의 유예기간 동안 배터리 사업을 할 수 있는 SK이노보다 화재 사건 탓에 자금 확보가 불가피해 합의금이 필요해진 LG엔솔이 협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
그동안 LG엔솔과 현대차는 ‘코나EV’ 등에서 화재가 끊이지 않자 일찌감치 배터리를 전량 교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비용 분담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LG엔솔은 배터리셀 제작을 맡고 현대차는 배터리팩과 배터리 관리시스템(BMS)을 생산하는 등 각자의 역할이 있는데, 화재 원인이 어느 단계에 있느냐에 따라 책임 소재와 비용 분담 규모가 크게 엇갈린다. 이 때문에 현대차와 LG엔솔은 책임 문제를 두고 이견을 보여 왔다.
화재 사건에 대해 정밀조사를 벌여온 국토교통부(국토부)가 지난 24일 중간 결과를 발표하면서, 현대차에서 제작하고 LG엔솔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자 3개 차종의 리콜 조치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책임 공방과 비용 분담 문제는 오히려 장기화될 전망이다. 국토부가 아직까지 화재 원인을 명확히 특정하지 못했지만 화재 위험성이 있는 일부 배터리를 완전히 추출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 소비자 보호를 위해 전량 교체 조치를 한다고 밝히면서 불씨를 남겼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사진=최준필 기자
국토부가 추정한 화재 원인과 LG엔솔의 입장도 다르다. 국토부는 ‘코나 EV’의 화재 원인이 LG엔솔 중국 난징공장에서 초기(2017년 9월~2019년 7월)에 생산한 배터리셀일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LG엔솔은 국토부 발표 이후 입장문을 통해 “재현 실험에서 화재가 발생하지 않아 직접적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 난징공장 현대차 전용 생산라인의 양산 초기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개선사항이 적용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당사가 제안한 급속충전 로직을 현대차에서 잘못 적용한 것을 확인했다. 화재 발생과 연관성이 있는지 관련 기관과 협조해 추가로 확인하겠다”며 현대차 책임에 방점을 찍기도 했다.
현대차는 국토부 발표 이후 공시를 통해 이번 리콜 비용이 1조 원이라고 밝혔다. 향후 국토부가 내놓을 최종 조사 결과에서 화재 원인이 배터리 결함으로 특정될 경우 LG엔솔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더 커진다. 여기에 LG엔솔은 지난해 LG화학에서 분사해 올해 처음으로 독립된 성적표를 받는다. 배터리 사업의 수익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만큼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충당금(판매한 제품의 교환 및 환불에 따라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금액을 부채로 설정)을 만들게 될 수도 있다. 충당금 설정 등으로 인한 실적 악화는 LG엔솔이 올해 추진 중인 IPO(기업공개·상장)에도 영향을 준다.
LG엔솔이 SK이노에서 빠르게 합의금을 받아내면 재무구조 개선에 숨통이 트인다. 반면 SK이노는 LG엔솔의 급한 상황을 이용해 합의금을 최대한 낮추려 할 수 있다. 결국 코나EV 리콜이 배터리 소송전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음에도 양측 협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차는 LG엔솔 대신 SK이노 배터리 탑재 비중을 늘리고 있다. 최근 현대차그룹이 2023년 이후 출시하는 전용 플랫폼(E-GMP) 전기차 3차 물량의 배터리 공급사로 SK이노와 중국 CATL만 선정됐다. 앞서 현대차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활용하기 전까지 LG엔솔 배터리는 현대차에, SK이노 배터리는 기아차에 주로 탑재하는 등 두 회사에서 고르게 배터리를 공급받아왔다.
LG엔솔과 SK이노의 희비를 가른 건 배터리 화재 문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SK이노 배터리에선 아직까지 화재 발생 사례가 없다. 배터리업계 한 관계자는 “화재 논란이 지속되는데 LG엔솔을 배터리 공급사로 선정하기엔 현대차 측에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며 “다만 예상과 달리 현대차가 2024년 이후 물량의 공급사는 이번에 선정하지 않았는데, LG엔솔을 염두에 둔 조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화재 사건의 책임 공방과 비용 조율 논의가 길어지고 추후 LG엔솔의 배터리 결함 문제가 원인으로 명확히 확인될 경우, 현대차가 아직 선정하지 않은 생산 물량 공급사로 LG엔솔 대신 SK이노를 택할 가능성이 있다. 현대차는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복수의 공급사를 선정하는 만큼 여전히 LG엔솔이 참여할 길은 열려 있지만 그 자리를 이번 공급사 선정처럼 CATL이 차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선 현대차가 LG엔솔과 SK이노 협상의 핵심 키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SK이노가 내야 할 합의금을 LG가 리콜 비용으로 활용하고, 현대차가 SK이노 공급 물량을 이번보다 더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선수주, 후증설이라는 배터리 업체들의 생산 구조 특수성을 고려하면 SK이노 공급물량을 갑작스럽게 늘리기 어렵고, SK이노 역시 화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코나EV 등에 자사 물량을 공급하는 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LG엔솔 관계자는 “ITC 소송과 리콜 조치는 전혀 별개로, 두 사안을 연결하는 건 맞지 않다”며 “리콜은 원인 규명 등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소비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조치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할 계획이다. SK이노와 협상은 기존 입장과 지적재산 보호 원칙에 따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