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데뷔’ 박찬호 6회 2실점 호투…1실점 김병현 “재미있었다” 싱글벙글
KBO리그에 첫 선을 보인 빅리거 출신 추신수가 개막 후 4경기 만에 첫 홈런을 때려내며 KBO리그 첫 안타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추신수의 KBO리그 데뷔전은 때마침 신생 구단 SSG의 창단 첫 경기라 더 뜻깊었다. 이름을 바꾸고 새 단장해 문을 연 SSG랜더스필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스타벅스가 입점한 야구장으로 화제를 모았다. 구단주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관중석에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면서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고, SSG는 최정과 최주환의 동반 멀티 홈런으로 기분 좋은 승리를 따냈다. 김원형 SSG 감독도 프로 사령탑 첫 승을 신고하는 기쁨을 맛봤다.
다만 이날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추신수는 안타 없이 물러났다. KBO리그 공식 데뷔전 성적은 3타수 무안타 1볼넷 1도루. SSG 입단 직후부터 쏟아진 기대와 그로 인한 부담이 추신수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한창 몸을 만들 시기에 새 팀과 계약하고 한국으로 건너오느라 평소 루틴대로 시즌을 준비하지 못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추신수는 결국 개막 네 번째 경기인 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호쾌한 홈런으로 시즌 1호 안타를 장식했다. KBO리그 첫 안타, 첫 홈런, 첫 타점, 첫 득점을 한꺼번에 해결한 한 방이었다.
대한민국 1호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KBO리그 마운드에 서기까지 특별 규정을 만드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쳤다. 사진=연합뉴스
#‘특별법’까지 통과시킨 박찬호의 첫 승
추신수는 무려 16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뛴 베테랑 스타플레이어다. KBO리그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빅리그에서 성공을 거두고 금의환향한 모범사례다. 앞서 한국보다 메이저리그를 먼저 경험했던 한국인 빅리거들도 KBO리그에서 ‘유턴 데뷔’를 할 때 엄청난 환영과 관심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빅리거이자 아시아 선수 최다승(124승) 기록 보유자인 박찬호가 대표적이다.
박찬호는 2011년 말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에서 방출된 뒤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끝내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그 소식을 들은 박찬호의 고향(공주) 연고팀 한화 이글스는 야심 찬 영입을 추진했다. 다만 KBO 규약에 ‘1999년 이전 해외에 진출한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 데뷔하려면 신인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게 문제였다. 1994년에 LA 다저스와 계약한 박찬호가 이 규정을 따를 경우, 2012년 8월 신인드래프트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때 한화가 우선지명권을 행사하더라도 2013시즌에야 한국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불혹을 앞둔 박찬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1년의 공백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따라서 한화는 각 구단 단장들이 참석한 KBO 실행위원회에서 ‘박찬호의 국내 입단에 관한 특별 규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화가 2007년 해외파 특별지명회의 때 추첨 순번이 뒤로 밀려 유일하게 지명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기에 더 그랬다. 당시 지명된 롯데 송승준, 삼성 채태인 등이 각 팀에서 주전 선수로 자리 잡는 모습을 봤으니, 한화의 박탈감은 더 컸다.
다행히 모든 구단 단장이 “박찬호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한시적 예외를 허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고 사실상 승인을 해줬다. 사장단 모임인 KBO 이사회 역시 일사천리로 ‘박찬호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박찬호는 극적으로 2012년 고향팀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당연히 한국 야구계는 들썩거렸다. 폭발적인 관심도 쏟아졌다. 그리고 그해 4월 12일,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마침내 청주구장 마운드에 섰다. 대전구장 리모델링 때문에 한화가 4월 한 달간 청주구장을 홈으로 쓰던 시기다. 한화는 3연패 중이었고, 박찬호는 시범경기에서 부진했다. 그래도 한대화 당시 감독은 박찬호를 믿고 선발 투수로 내보냈다. 역사적인 데뷔전이 청주에서 성사됐다.
박찬호는 정규시즌 첫 등판에서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의 관록을 뽐냈다. 타자들의 연이은 커트에 고생하고 실투로 집중타를 내주던, 시범경기 때의 그 투수가 아니었다. 1회에 볼넷과 도루, 수비 실책이 겹쳐 1사 1·3루 위기를 맞았지만 삼진과 땅볼로 무사히 넘겼다. 3회는 아예 공 3개로 한 이닝을 끝냈다. 두산 베어스 우타자 고영민에게 바깥쪽 낮은 직구, 좌타자 이종욱과 정수빈에게 각각 바깥쪽 낮은 직구와 투심패스트볼을 하나씩 던졌다.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초구를 때려 모두 땅볼로 아웃됐다. 1이닝 최소투구 퍼펙트. 3년 7개월여 만에 나온 통산 36번째 진기록이었다.
당시 두산 사령탑이던 김진욱 감독은 경기 전 “세계적인 투수 박찬호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3번 김현수를 선발 출장시킨다”며 웃었다. 바로 그 김현수가 3타수 무안타로 돌아섰다. 2회 용덕한을 상대로는 4구째 시속 149km 직구를 던져 혀를 내두르게 했다. 박찬호가 던지는 내내 코칭스태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찬호는 5-0으로 앞선 7회 1사 1·2루서 불펜 송신영으로 교체됐다. 500석을 가득 메운 청주구장의 만원 관중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하늘이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가 그라운드를 덮었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박찬호는 모자를 벗어 화답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기다리는 동료들 품에 안겼다. 페넌트레이스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코리안 특급’에게 멈추지 않는 환호가 쏟아졌다.
다음 투수 송신영이 적시타를 맞아 박찬호의 실점이 생겼지만, 이미 흐름은 한화 쪽으로 넘어간 뒤였다. 박찬호는 6⅓이닝 4피안타 5탈삼진 2실점으로 호투해 팀의 3연패를 끊었다. ‘KBO 신인 투수’ 박찬호의 데뷔전은 감격적인 첫 승으로 끝났다.
#데뷔전에서도 빛났던 김병현의 여유
김병현은 한국인 빅리거 중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주전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박찬호와 마찬가지로 2011년 일본 프로야구 라쿠텐 이글스에 입단해 재기를 노렸지만, 예전의 위용을 되찾지 못하고 방출됐다.
그때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가 놀라운 발표를 했다. 김병현과 계약금 10억 원, 연봉 5억 원, 옵션 1억 원 등 총액 16억 원에 계약했다는 내용이었다. 넥센이 2007년 해외파 특별지명에서 김병현 지명권을 뽑을 때만 해도, 훗날 그가 실제로 넥센 유니폼을 입게 될 거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실력만큼이나 기행으로도 유명했던 김병현이 파격적인 KBO 유턴 선언으로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시범경기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해프닝을 일으켜 웃음을 자아냈다. 김병현은 2012년 3월 29일 사직구장에서 국내 무대 공식 경기에 처음 등판했는데, 유니폼 뒤에는 ‘김병현’이 아니라 투수진 최고참 ‘이정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판 일정 통보를 받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랴부랴 이동하는 과정에서 팀 빨랫감 분류에 착오가 생겨 유니폼을 빠뜨리고 온 거였다. 선배의 유니폼을 빌려 입고 한국 야구팬에게 첫 선을 보인 김병현은 1⅔이닝 동안 8타자를 상대로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무난한 피칭을 했다.
김병현의 ‘진짜 데뷔전’ 성적은 시범경기 결과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4월 8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홈경기에 9회 초 팀의 네 번째 투수로 나섰다. 김병현의 KBO리그 데뷔를 공식화하는 정규시즌 첫 등판이었다. 팀이 2-7로 뒤져 있던 터라 컨디션 점검과 실전 테스트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럼에도 전광판 투수칸에 ‘김병현’이라는 이름이 뜨고 그가 마운드로 걸어가자 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식어있던 경기장 분위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김병현은 LG 대타 이대형을 상대로 초구부터 직구를 스트라이크로 꽂아 넣었다. 하지만 곧 이대형에게 좌전 안타를 내줬고, 다음 타자 양영동, 김일경에게도 연속 안타를 맞아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점수를 내줬다. 그래도 1실점 후에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서동욱을 1루수 땅볼로 처리한 뒤 김태군의 투수 앞 땅볼 때 넘어지면서도 공을 놓치지 않는 투지를 보여 3루 주자의 득점을 막았다. 그리고 마지막 타자 오지환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면서 경기를 마쳤다.
1이닝 3피안타 1실점을 기록한 그는 경기 후 “첫 경기라 그런지 재미있었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렇게 등판하게 돼 기분 좋았다. 초구 직구를 던진 뒤 변화구를 테스트했는데, 몸이 덜 풀려서 안타를 연속으로 맞았다. 그래도 전혀 긴장은 하지 않았다”며 특유의 여유를 뽐냈다.
#호투하고도 패전 투수 된 서재응, 부담이 컸던 김선우
서재응은 메이저리그 시절 ‘컨트롤 아티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원래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졌지만, 팔꿈치 인대접합수술 이후 구속이 많이 떨어지자 제구력을 주무기로 삼아 선수생활을 했다. 원래 구속과 제구력을 모두 갖춘 투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광주일고 출신인 서재응이 탐났던 KIA 타이거즈는 2005년부터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던 서재응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냈다. 한동안 빅리그 도전을 이어가던 서재응은 2007시즌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3승을 올린 뒤 5월 말 다시 트리플A로 강등되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고향팀의 대대적인 환영 속에 어린 시절 꿈이었던 타이거즈의 붉은 유니폼을 입었다.
첫 등판부터 ‘에이스의 숙명’을 짊어졌다. 서재응은 2008년 4월 1일 광주 홈 개막전에서 KBO리그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상대는 그해 우승 후보였던 두산 베어스. 팀이 삼성과 개막 2연전을 모두 패하고 홈으로 온 터라 어깨가 무거웠다. KIA 팬은 빅리그 28승 투수 서재응이 연패 위기를 끊어주기를 기대했다.
기대 속에 시작된 서재응의 첫 경기.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메이저리그 6시즌 경력을 뽐내기엔 충분했다. 1회 1사 후 두산 민병헌과 김현수에게 안타를 맞고 첫 실점을 했지만, 2회부터는 일사천리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나갔다. 최종 결과는 6이닝 5피안타 2볼넷 3탈삼진 1실점. 투구 수 97개 중 68개가 스트라이크였다.
문제는 KIA 타선이 두산 선발 맷 랜들에게 꽁꽁 묶여 단 한 점도 뽑지 못했다는 거였다. 결국 서재응은 데뷔전에서 첫 승 대신 첫 패를 안았다. 그는 팀 패배를 아쉬워했지만, 자신의 투구에 대해선 “공을 넣고 싶은 곳으로 넣을 수 있었다. 다음엔 더 좋은 공을 던질 수 있을 거 같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사실 서재응이 한국 프로야구에 첫선을 보인 이날, 또 다른 빅리거 출신 투수도 같은 장소에서 KBO리그 데뷔전을 치를 뻔했다. 서재응과 같은 시기에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두산 베어스 김선우다. 원래 김선우를 4월 1일 KIA전에 등판시키려 했던 김경문 당시 두산 감독은 둘의 맞대결에 쏟아질 지나친 관심과 선수의 부담을 고려해 날짜를 하루 미뤘다.
그 결과 김선우는 다음날인 2일 같은 장소에서 친구 서재응의 소속팀 KIA를 상대로 처음 KBO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4이닝 동안 안타 7개를 맞고 볼넷 4개를 내주면서 4실점했다.
초반부터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투구수 71개 중 50개가 직구일 만큼 유독 비중이 높았지만, 안타 7개 중 6개가 직구를 공략당해 내준 거라 아쉬움을 남겼다. 최고 시속 148km를 찍은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김선우는 등판을 마친 뒤 “국내 복귀 첫 등판이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힘이 좀 들어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잠실에 만원 관중 모은 최희섭의 첫 타석
물론 KBO리그를 처음 경험하는 선수가 첫 경기부터 좋은 성적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서재응, 김선우보다 1년 먼저 한국으로 돌아온 빅리그 출신 타자 최희섭 역시 KBO리그 데뷔전에선 침묵했다.
최희섭은 탬파베이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2007년 4월, KIA와 전격 계약했다. 탬파베이에 입단하면서 계약서에 ‘선수 본인이 원할 경우 자유로운 이적을 허용한다’는 조항을 넣은 덕분이다.
시즌이 이미 개막한 뒤 한국으로 온 터라 시차적응 시간마저 부족했지만, 야구계는 매일같이 최희섭의 데뷔전을 기다렸다. 타격 훈련 때마다 방송과 스틸 카메라가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것은 물론, 경기 전 프리배팅 때조차 팬들이 담장을 넘어오는 타구를 잡기 위해 외야에서 대형 쓰레기통을 들고 진을 칠 정도였다.
최희섭의 KBO리그 첫 경기로 확정된 5월 19일 잠실 두산전에는 만원 관중이 몰려 폭발적인 관심을 입증했다. 다만 최희섭은 3루 관중석을 꽉 채운 KIA 응원단의 열렬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삼진 1개 포함 5타수 무안타로 침묵해 아쉬움을 남겼다. KIA가 에이스 윤석민의 호투를 앞세워 승리한 게 그에게는 위안거리였다.
최희섭은 경기를 마친 뒤 “긴장을 안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자신감은 있었는데, 한국 투수들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매 게임 집중해서 빨리 적응하는 게 관건이다. 한국팬들의 열정에 깜짝 놀라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고 웃어 보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