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가 꿈꾸다 사제의 길로…최연소 주교·교회법 권위자, 연명치료 거부·장기 각막 기증 다 주고 떠나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생전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장기와 각막을 기증하겠다는 글을 직접 써두었던 고인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고 선종했다.
1931년 12월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난 정진석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사진=일요신문DB
#책을 좋아하고 발명가 꿈꿨던 학창시절
1931년 12월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난 정진석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기 때문인데 정진석 추기경의 모친이 ‘아들이 주교가 되는 태몽’을 꾸었다고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사제의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열 살 때부터 명동성당에서 ‘복사’(미사 등 천주교 예식 때 보조하는 일) 일을 맡는 등 천주교 신자로서 열심히 살아 왔지만 홀어머니와 사는 외아들이었던 터라 사제의 길을 선택하는 건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정 추기경은 중학교 2학년 때(1945년)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게 된 뒤 사춘기 시절 천주교와 유물론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고교시절인 1947년 명동성당에서 윤형준 신부의 사순절 특강을 들은 것을 계기로 그런 갈등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사제의 삶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정 추기경의 부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인 역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일본으로 간 뒤 연락이 끊긴 정도로만 회상했을 뿐이다. 정 추기경의 부친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를 나와 중국 만주의 뤼순 공과대학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된 뒤에는 북한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 추기경은 중앙고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합격했다. 학창시절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는 정진석 추기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언급한 게 바로 ‘발명왕 에디슨’이다. 그 영향으로 발명가의 꿈을 키워갔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전공을 선택했다.
그런데 바로 그해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진석 추기경 역시 직접 전쟁을 통해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특히 전쟁 초기에 매우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된 뒤 UN군과 국군의 서울 수복이 임박한 시점에 정진석 추기경은 삼선교 인근 은신처에 6촌 동생과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포탄 하나가 은신해 있던 집으로 떨어져 서까래가 무너져 내리면서 옆에서 자고 있던 동생을 덮쳤다.
허영엽 신부가 정진석 추기경의 회고를 토대로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한 ‘추기경 정진석’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이 글에서 전 추기경은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 동생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삶은 덤으로 받아 사는 것이다”라고 당시의 감정을 밝혔다.
#교회법의 권위자인 학자형 사제
한국전쟁 휴전 뒤 정진석 추기경은 1954년 성신대(현 가톨릭대)에 재입학해 196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울대교구 중림동 본당 보좌신부로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정진석 추기경은 신학교 교사, 교구장 비서 등으로 봉직하다 1968년 로마 우르바노대학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교회법을 전공한다. 1년 6개월 만에 교회법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교회를 방문했다가 미국에서 주교 임명 소식을 듣고 귀국해 1970년 청주교구장에 취임했다. 당시 39세로 국내 최연소 주교였다.
1970년부터 28년 동안 청주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고 김수환 추기경이 정년을 맞아 교황청에 사직서를 내면서 서울대교구장(대주교)으로 임명됐다. 2012년까지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를 지낸 정 추기경은 2006년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이 됐다.
정진석 추기경은 사제가 된 뒤 50여 권의 교리서와 에세이 등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2020년 10월에 출간된 ‘참신앙의 진리’다. 서울 천주교서울대교구 교구청에 전시돼 있는 정진석 추기경의 육필 원고. 사진=최준필 기자
1968년 로마 우르바노대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한 정진석 추기경은 교회법 석사학위를 받은 학자형 사제로 교회법의 권위자였다. 유학시절 라틴어-일본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접한 뒤 라틴어-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으로 있던 1983년 교회법 번역위원회를 출범시켜 비로소 그 꿈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교회법 전공 사제 10여 명과 교회법전 번역 작업에 돌입해 1989년에 비로소 ‘라틴어-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완성한다.
이후 그 내용을 보다 쉽게 많은 신도들에게 알리기 위해 틈틈이 교회법 해설서를 써서 2002년까지 모두 15권의 교회법 해설서를 완간했다. 이런 노력은 2020년 9월에 출간된 ‘교회법해설’ 개정판으로 이어졌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집필활동
학창 시절 책을 좋아했던 정 추기경은 사제가 된 뒤 50여 권의 교리서와 에세이 등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2020년 10월에 출간된 ‘참신앙의 진리’가 됐다. 꾸준한 집필 활동은 부제 시절 룸메이트인 고 박도식 신부와 매년 책을 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정진석 추기경의 첫 번째 역서는 ‘성녀 마리아 고레티’다. 정진석 추기경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돼 미군 통역병으로 일했다. 그 즈음 미군 군종 신부가 갖고 있던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읽게 됐는데 이 책이 사제의 길을 걷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된 ‘추기경 정진석’에서 정 추기경은 “희미하던 새벽의 어둠이 해가 뜨면서 사라져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제가 돼야겠다”고 당시의 감정을 표현했다. 비록 당시 신학생 신분이었던 터라 본인 이름으로 출간되진 않았지만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정진석 추기경이 처음으로 번역해 출간한 책이 됐다.
정진석 추기경은 1970년 39세의 나이에 국내 최연소 주교로 임명됐다. 주교 임명 수락 서신을 받은 날이 1970년 7월 6일이었는데 이날은 바로 ‘성녀 마리아 고레티 축일’이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읽고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정 추기경은 그렇게 마리아 고레티 성녀의 축일에 주교가 됐다.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발명가를 꿈꿨던 과학도였던 부분도 집필 활동에 영향을 미쳐 2003년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는 책을 펴내게 된다. 한편 2018년에는 서울대학교 입학 68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지난 4월 27일 밤 10시 15분 정 추기경은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건강 악화로 두 달 전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 몇 차례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진=최준필 기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소서(Omnibus Omnia)’
1970년 청주교구장을 맡은 정진석 추기경은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았고 가급적 불을 밝게 켜지 않았다. 이면지를 자주 사용하고 바지 한 벌을 18년 동안 입을 만큼 검소하게 지냈다. 식사는 늘 교구 내 식당에서 했고 외부 식사 초대는 일절 거절했다. 그 이유는 식사 초대를 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28년 동안 청주교구장으로 지냈는데 1970년 처음 청주교구장이 됐을 당시 4만 8000명이던 교구 신자 수는 1990년에 8만 명을 넘겼다.
청주교구장 임명 당시 세운 사목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소서(Omnibus Omnia)’로 주교로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사목표어는 정 추기경의 좌우명이 됐고 평생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며 약한 이들에게 정성을 쏟아왔다. 그만큼 고인에게는 ‘나눔’이 중요한 의미였다.
검소하게 지내며 모은 돈을 늘 나눔을 위해 썼다. 청주교구장 시절부터 오웅진 신부가 일군 ‘꽃동네’ 설립과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신자들이 “생활비에 보태라”며 조금씩 건네 왔던 돈을 40년 동안 모아 1999년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에 장학기금으로 5억 원을 건네기도 했다.
2012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 주교관에 머물며 검소한 삶을 이어가며 저술활동에 매진해왔다.
지난 4월 27일 밤 10시 15분 정 추기경은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건강 악화로 두 달 전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 몇 차례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다. 노환에 따른 대동맥 출혈로 수술 소견을 받았지만 이미 고령이고 주변에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며 수술을 받지 않았다.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다며 연명치료 거부 의사도 밝혔었다. 2006년에 ‘사후 각막기증’을 약속했고 다른 사람에게 기증이 안 되면 연구용으로 사용해 달라는 생전 유지에 따라 정 추기경의 각막은 실험연구용으로 사용되게 됐다.
#교단 견해 충실히 대변
민감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 교단의 견해를 충실하게 대변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생명과 관련된 문제를 중요시 했다.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배아도 인간 생명”이라며 완강한 반대 견해를 보였다.
‘생명’ 운동 차원에서 일찌감치 장기기증도 서약했다. 2006년 서울대교구 성체대회에서 공개적으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약속하는 사후 장기기증에 서명했다.
교단의 견해를 충실하게 대변해온 터라 다소 보수적이라는 평도 받아 왔다. 가정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낙태 시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다. 교황청 기구 가정평의회 위원으로도 오랜 기간 활동했다. 사학법 개정에도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전교조 교사들의 학교 이사회 영입에 부정적 견해를 밝혀왔으며 사립학교의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만큼 정의구현사제단 등 천주교 내 진보적 단체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2010년에는 정 추기경이 책 출간을 겸한 기자간담회에서 “주교회의의 결정은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아니”라며 “난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며 제대로 잘 개발해 달라는 취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교회의 결정 내용과 달리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듯한 이 발언은 거센 후폭풍을 불러왔다. 심지어 원로사제 25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정 추기경의 서울대 교구장직 용퇴를 촉구했을 만큼 큰 논란이 불거졌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