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수 골절 막는 검투사 헬멧 원조, 양의지 보호장치 덧댄 헬멧 미국 직구…미국서 개발 ‘투수용’ 불편함이 문제
야구공의 지름은 7.23cm, 무게는 140g 안팎이다. 직접 쥐어 보면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야구공을 타자가 맞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압력의 무게는 약 80톤(t)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8kg짜리 물체가 1m 위에서 떨어져 지면에 닿았을 때의 충격과 맞먹는다.
하물며 공으로 가장 치명적인 머리와 얼굴을 맞았을 때 충격과 공포는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다. 그렇다고 마음먹은 대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 공이 날아와 몸에 상처를 입힐지 예측할 수 없다.
4월 16일 잠실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과 LG의 경기 8회초 두산 박세혁이 LG 김대유 투구에 맞아 쓰러진 뒤 동료들 부축을 받으며 엠뷸런스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헤드샷 맞고 안와골절 수술한 박세혁
두산 베어스 포수 박세혁은 올 시즌 개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운을 겪었다. 4월 16일 잠실 LG 트윈스전에서 0-1로 뒤진 8회 초 1사 후 LG 투수 김대유의 3구째 몸쪽 직구에 헬멧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대로 쓰러진 박세혁은 오른쪽 광대뼈 부근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누운 채로 응급처리를 한 뒤 구급차에 실려 인근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헤드샷을 의도하지 않았던 김대유도 충격을 받았다. 마운드 근처에 주저앉아 안절부절 못하다 이내 박세혁과 두산 선수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김대유는 박세혁이 후송된 뒤 헤드샷 규정에 따라 퇴장 명령을 받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경기 후엔 LG 류지현 감독과 외국인 투수 케이시 켈리 등이 “승리의 기쁨보다 박세혁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큰 이상 없이 복귀했으면 좋겠다”고 염려했다. 박세혁은 이전 타석에서도 LG 선발투수 켈리에게 사구를 맞은 터다.
박세혁은 병원 검진 결과 오른쪽 안와골절로 빠른 수술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결국 부상 사흘 뒤인 지난 19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성형외과와 안과 전문의 협진으로 이뤄졌다.
다행히 경과는 좋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수술 이후 통화도 하고 얼굴도 봤는데, 수술이 잘 돼서 그런지 겉으로는 조금 멍든 정도로 보였다. 회복이 생각보다 빠른 것 같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산 관계자는 “박세혁은 수술 나흘 만인 23일 퇴원했다. 27일 검진 결과 안과에서는 안구에 출혈이 있어서 2주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성형외과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견”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복귀 시기를 저울질할 단계는 아니다. 일단 쉬면서 수술 부위 회복을 기다린 뒤 추후 경과를 살펴 재활과 훈련 스케줄을 잡아야 한다. 박세혁은 야심차게 준비한 올 시즌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됐고, 8월 도쿄올림픽 출전도 불투명해졌다. 두산 선수단은 모자와 헬멧에 박세혁의 등번호를 새기고 경기에 나서고 있다.
본의 아니게 부상의 원인을 제공한 김대유 역시 여러 차례 사과를 전했다. 그는 홀드 1위 자격으로 인터뷰를 하면서 “먼저 꼭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두산전에서 일이 아직도 마음에 계속 남아 있다”며 “박세혁 선배와 이를 지켜보셨을 가족분들 그리고 팬분들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세혁에게도 직접 문자 메시지를 보내 사과했다는 그는 “세혁이 형이 답장으로 ‘빨리 돌아갈 테니 힘들어하지 말라’면서 ‘운동장에서 웃으며 보자’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메시지를 받고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고 털어놨다.
사구로부터 얼굴을 보호하는 일명 ‘검투사 헬멧’은 KBO리그 대표 스타인 이정후도 애용하는 보호 장구다. 사진=연합뉴스
#헤드샷의 위험, ‘검투사 헬멧’이 등장한 이유
그동안 KBO리그에서 얼굴에 공을 맞아 큰 부상을 당한 선수는 여럿 있었다. 심정수, 이종범, 조성환, 조동찬, 이종욱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두 타석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프로야구에는 머리뿐 아니라 얼굴까지 보호하는 일명 ‘검투사 헬멧’이 유행했다.
헬멧은 타자들의 필수품이자 최소한의 보호장치다. 1920년 메이저리그에서 레이 채프먼이 빈볼에 맞아 두개골 골절로 숨진 사고가 발생한 뒤 모든 타자의 헬멧 착용이 의무화됐다. 그러나 일반 헬멧으로는 머리나 얼굴로 날아오는 공의 충격을 온전히 견뎌내기 힘들다. 그래서 일반 헬멧에 왼쪽 뺨과 턱(오른손 타자 기준)을 가리는 보호판을 덧대 안면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제작한 장비가 검투사 헬멧이다. 가장 골절상을 많이 입는 광대뼈와 턱 부분을 덮는 데 특화됐다.
가장 먼저 이 헬멧을 착용한 선수는 ‘헤라클레스’ 심정수다. 그는 현대 유니콘스 소속이던 2001년 롯데 자이언츠 강민영의 직구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가 함몰됐다. 한 달 넘게 쉬어야 했고,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이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구단이 직접 만들어준 검투사 헬멧을 쓰고 경기에 복귀했다.
임시로 착용하다 다시 원래 헬멧으로 돌아왔지만 2003년 4월 롯데 박지철의 공에 한 번 더 얼굴을 맞은 뒤에는 시즌 내내 착용하기 시작했다. 2004년 삼성 이적 후에도 계속 사용해 아예 심정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물론 큰 효과도 봤다. 2005년 현대 송신영이 던진 공에 다시 얼굴을 맞았지만 특수 제작 헬멧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심정수가 도입한 검투사 헬멧은 점점 진화했다. 2015년 이후로는 과거처럼 일반 헬멧에 보호판을 덧대는 게 아니라 아예 일체형으로 제작한 완성품 헬멧이 출시됐다. 검투사 헬멧을 원하는 선수들의 수요가 점점 늘어서다. ‘수제’ 검투사 헬멧은 보호대가 시야를 가리는 단점이 지적됐지만, 헬멧업체들이 제작한 신형 헬멧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후관리’가 아닌 ‘예방’ 차원에서 검투사 헬멧을 쓰는 선수가 점점 늘어났다. KIA 타이거즈 나지완이 사구에 얼굴을 맞지 않고도 이 헬멧을 착용하기 시작한 첫 사례였다. 유독 몸에 공을 많이 맞다 보니 자꾸 두려움이 생겨서다. 그는 “내가 몸쪽 높은 공에 약한 편이다. 투수들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코스로 공을 많이 던졌다. 헬멧 덕분에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
몸에 맞는 볼, 사구에 대한 공포는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사진=연합뉴스
#점점 진화하는 사구 보호 장비
4년 전에는 검투사 헬멧에서 한 단계 진화한 특수 헬멧까지 등장했다. 일반 헬멧과 검투사 헬멧의 중간 형태로, 헬멧 안쪽에 더 두꺼운 충격 보호 장치를 덧대 머리 전체를 단단하게 감싸는 느낌을 준다. 또 귀를 덮는 부분이 더 두껍고 크게 제작돼 골절 위험이 큰 광대뼈 부분까지 덮어준다. 보호대가 얼굴 앞부분까지 튀어나오는 검투사 헬멧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공을 맞았을 때 머리 전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했다. 이 헬멧을 써본 선수들은 “헬멧 바깥쪽 플라스틱도 워낙 단단해 기존 헬멧보다 든든한 느낌을 준다”고 증언했다.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선수들에게 이 헬멧이 지급되면서 각 팀으로 유행이 번졌다. 태극마크를 달았던 주축 타자들이 소속팀으로 헬멧을 가져가 정규시즌에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방 구단의 한 타자는 “대표팀에 다녀온 형들이 쓰는 것을 보고 알게 돼 헬멧 제작 업체에 직접 주문했다. 확실히 훈련 때나 경기 때 마음이 편하다. 공에 맞아도 충격이 덜할 것 같아 안심이 된다”고 했다.
사실 이 헬멧의 원조는 NC 다이노스 포수 양의지다. 그는 두산 시절이던 2016년 6월 23일 잠실 LG전 타석에서 헬멧 부분에 공을 맞고 쓰러졌다. 정밀검진 결과 큰 이상은 없었지만 후유증이 컸다. 간헐적인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결국 2군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 후 한 달이 지난 뒤에는 포수로 앉아 있다가 상대 타자가 타석에서 휘두른 배트에 다시 머리 부분을 맞았다. 심한 스트레스와 위기감을 느낀 그는 일부 메이저리거들이 착용하던 이 헬멧을 수소문해 사비로 미국에 주문했다. 시즌 막바지부터 이 ‘직구 헬멧’을 쓰기 시작한 양의지는 심리적 안정을 얻어 다시 성적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후 두산의 다른 선수들도 이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대유행’으로 번졌다.
#투수들을 위한 헬멧이 없는 이유
사실 경기 중 위험에 노출되는 건 타자들만 아니다. 투수도 언제든 강습타구가 날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두산 신인 투수 김명신은 2017년 4월 25일 고척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두산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상대 타자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직접 맞았다. 왼쪽 광대뼈 세 군데가 골절됐고, 안면부 골절과 함몰 수술을 받았다. 시력에 이상이 없는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이뿐 아니다. 김원형 SSG 랜더스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뛰던 1999년 7월 10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에서 얼굴에 공을 맞아 광대뼈 세 군데가 함몰되고 코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0개월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최상덕은 1995년 태평양 돌핀스 시절 타구가 얼굴로 날아와 앞니 네 개가 부러지고 잇몸 열두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당한 적이 있다. LG에서 은퇴한 김광삼은 2016년 8월 2군 경기 도중 타구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골절됐고, 뇌출혈 진단까지 받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투수들이 강습타구를 피하지 못해 부상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타자들과 달리 투수들은 보호 장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몸에 유니폼이 아닌 다른 장비를 착용하는 것 자체가 투구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헬멧은 물론 초창기 투수들이 사용했던 낭심 보호대조차 “허리 회전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라진 지 오래다.
각 팀 투수들은 스프링캠프 때 강습타구 대비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다. 그러나 타구가 눈앞으로 날아오면 일단 잡아서 처리하고 싶은 게 투수들의 본능이다. 문제는 타자들이 친 타구에는 스핀이 걸리면서 속도가 붙는다는 거다. 아무리 민첩한 투수도 투구 동작을 마친 뒤 곧바로 몸을 틀어 피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투수들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메이저리그 역시 ‘투수용 헬멧’을 개발해 사무국 차원에서 활성화를 검토하기도 했다. 이 헬멧은 윗부분이 뚫려 있어서 기존 투수 모자 위에 덧씌울 수 있는 구조다. 시속 137km 안팎의 타구를 견뎌 낼 수 있는 강도로 제작됐다. 무엇보다 재질이 탄소 섬유라 무게가 300g에 불과하다. 무게를 최대한 줄여 투구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다.
그럼에도 투수들은 여전히 효용성을 의심한다. 한 베테랑 투수는 “투구 때 쓰는 일반 모자 자체도 껄끄러운데 무게가 조금 더 나가는 헬멧까지 쓰면 아무래도 공을 던질 때 불편할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상용화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