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27건 공개, 확정 사건 모두 20년형 이상 중형…들쭉날쭉 기준 논란 ‘국민적 관심’도 판단 근거
하지만 피의자 신상공개의 역사를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적용 기준에 논란이 뒤따른다. 올해 초 정인이 사건의 양모나, 2020년 경기도의 한 교회에서 발생한 아동 성착취 사건 피의자 등은 신상정보 공개를 피해갈 수 있었다. 범죄 혐의 입증 가능성이나 미성년·피의자 인권 등이 주된 불허 이유인데, 실제 지금까지 공개된 27건의 사건 가운데 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18건 모두 징역 20년 이상,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9년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제대로 된 신상 공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듬해 4월 피의자 신상공개 규정이 신설됐다. 사진=일요신문DB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호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09년. 경기 서남부 지역, 강원도 정선군, 경기도 안산시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 범인이었던 그가 죽인 여성 중 확인된 피해자 수는 10명에 달했다.
그 전에 신상공개는 다소 기준이 들쭉날쭉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강력사건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관행이었다. 재범 방지 등 동종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를 높게 샀다. 하지만 2004년 밀양 여중생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식이 바뀌었다. 미성년자였던 가해자들의 신상이 공개되자 인권 침해 논란이 제기됐고, 결국 경찰은 그 후 피의자 연행 과정에서 모자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게 일반화됐다.
하지만 강호순 사건 이후, 수사기관 주도 하에 이뤄지는 제대로 된 신상공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듬해인 2010년 4월 피의자 신상공개 규정이 신설됐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8조의 2(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를 신설, 해당 기준 충족 시 피의자의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할 수 있도록 했다. 신상정보 공개의 타당성 여부는 총 7명으로 구성된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데, 위원회 구성원 중 4명 이상은 의사, 교수, 변호사 등 외부 전문가로 위촉되도록 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대부분의 경찰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는 경찰 내부위원 3명, 외부위원 4명으로 구성된다.
공개 기준은 크게 세 가지. △범행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해야 하고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볼 증거가 충분해야 하며 △피의자 신상공개가 재범을 방지하고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는 등 공공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 단, 피의자가 미성년자인 경우는 공개 대상에서 제외한다.
서울 세모녀 살인 사건으로 신상이 공개된 김태현. 사진=임준선 기자
그 후 안산 인질 살해 사건(김상훈, 2015년 1월), 안산 시화호 토막 살해(김하일, 2015년 7월), 서울 수락삭 등산객 살해(김학봉, 2016년 6월) 등 매년 2~3건씩 신상공개가 이뤄졌다. 어금니 아빠 살인 사건의 이영학(2017년 10월),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의 김성수(2018년 10월), 청담동 주식 부자 이희진 부모 살인 사건의 김다운(2019년 3월), 제주 전남편 살인 사건의 고유정(2019년 6월) 등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서울 세모녀 살인 사건의 김태현(4월), 허민우의 신상이 공개됐다. 이렇게 모두 27건의 사건이 경찰 신상정보공개심의위에서 신상공개 결정을 받았다.
허민우가 저지른 노래방 살인 사건의 경우, 신상정보공개심의위는 먼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피해자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노래방 요금 시비와 112 신고 등을 이유로 폭행해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심하게 훼손한 것은 공개하기 충분할 만큼 잔인한 수법이라고 봤다.
선고가 확정된 사건 대부분이 ‘유죄’ 판단을 받았을 만큼, 증거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한 기준이다. 오원춘(무기징역), 고유정(무기징역), 이영학(무기징역), 김성수(징역 30년) 등 형이 확정된 사건 모두 중형이 선고됐다. 이희진 부모 살인 사건의 김다운 역시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돼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공개 기준을 놓고는 말이 많다. 일단 여성의 경우 신상공개된 사례가 고유정 한 명뿐이다. 고유정은 신상공개가 결정됐음에도 언론에 얼굴을 제대로 노출하지 않았다. 고유정은 범행 전후의 폐쇄회로(CC)TV 장면을 통해 얼굴이 알려졌지만, 호송 과정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내려뜨리는 방식으로 얼굴을 가렸고 경찰은 별도의 제지를 하지 않았다.
올해 초에는 정인이 양모에 대한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선 정인이 양부모에 대해 신상공개를 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이어졌다. 정인이 양모 사건 역시 신상공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경찰과 검찰은 별도의 신상공개를 추진하지 않았다.
성범죄의 경우는 신상정보 공개 기준이 낮아지고 있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던 신상정보공개심의위는 n번방 사건이 터지자 박사방 개설자 조주빈의 공범 강훈(만 19세)의 신상정보 공개를 결정했다. 미성년자는 신상공개를 제한하기 때문에 당시 경찰 심의위도 이 문제를 두고 고심했지만, 청소년보호법이 만 19세 미만을 대상으로 삼아 신상공개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의 경우 신상공개된 사례는 고유정 한 명뿐이다. 그러나 고유정은 호송 과정에서 긴 머리카락을 내려뜨리는 방식으로 얼굴을 가렸고 경찰은 별도의 제지를 하지 않았다. 사진=연합뉴스
실제 2010년 특강법 시행 후 신상공개가 가장 많았던 해는 2020년이다. 모두 6명이 공개됐는데, 이들 가운데 3명은 ‘박사방’과 ‘n번방’ 사건의 조주빈, 강훈, 문형욱 등이었다. 미성년자였던 강훈은 이에 반발, 서울행정법원에 ‘신상공개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기각했다.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 신상을 공개하느냐에 대해서는 경찰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의 판단이 엇갈렸다.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 사건의 김 아무개 씨 신상은 조현병을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같은 달 발생한 수락산 살인 사건의 김학봉은 정신질환이 있었음에도 신상이 공개됐다.
경찰 관계자는 “공개된 사건 목록을 잘 보면 지방보다는 서울, 수도권 등 언론이 더 주목해서 더 많은 국민적인 관심을 받는 사건들이 공개된 비중이 높다”며 “사건의 잔혹성 등도 중요하지만 언론에 얼마나 노출이 됐는지, 국민들의 공분 등 관심(알권리)이 얼마나 높은지도 공개 결정 여부의 중요한 판단 근거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