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표 기사들 하락세 반면 신진서·신민준 이제 시작, 정점 향하는 변상일, ‘기량 회복’ 박정환 눈길
이틀간 진행된 16강전에서 한국은 출발이 좋았다. 첫날 LG배 2연패에 도전하는 신민준이 강동윤과의 형제대결에서 173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신민준에 이어 신진서가 두 번째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신진서는 중국 복병 타오신란에게 284수 만에 백 3집반승을 거두며 24회 우승에 이어 두 번째 LG배 우승컵을 향해 한발 전진했다. 또 하나의 강력한 우승후보 박정환도 중국 탄샤오에 승리하며 역시 두 번째 우승 도전을 이어가게 됐다. 최근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변상일도 김명훈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8강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2일 속개된 16강 둘째 날 경기에서는 중국이 강세를 보였다. 중국 투톱 커제와 양딩신이 각각 원성진과 김지석에 승리하며 중국의 첫날 부진을 씻었다. 그리고 일본의 천원·기성(碁聖) 보유자 이치리키 료는 대만 신예 천치루이에게 승리를 거두고 한 장 남은 8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16강전을 모두 마치고 이어진 대진 추첨에서는 박정환-커제, 변상일-미위팅, 신민준-양딩신, 신진서-이치리키 료라는 대진이 만들어졌다. 한국 기사 4명이 중국 3명, 일본 1명과 대결하는 구도다. LG배는 같은 국가 선수 간의 대결을 최대한 피하면서 추첨으로 대진을 결정한다. 이는 4강 추첨 시에도 적용된다.
이번 LG배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한국 랭킹 1~3위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과 5위 신민준 모두 초일류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사로 성장했음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는 데이터를 통해서도 입증되는데 세계 바둑랭킹을 집계하고 있는 프랑스의 ‘고레이팅’에서는 2021년 6월 현재 3807점의 신진서를 1위로 집계하고 있으며 그 뒤를 3712점의 박정환이 따르고 있다. 3위부터가 중국세인데 3701점의 커제가 3위이고 4위 구쯔하오, 5위 양딩신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변상일도 6위에 올라 세계적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난해 LG배 우승자 신민준은 우승 직후 부진한 모습을 보여 19위에 랭크돼 있지만 LG배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듯 최근 회복세를 보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최근 바둑계 최대 화두는 한국 바둑이 과연 중국 바둑을 따라잡았느냐, 혹은 넘어설 것인가다. 한국은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을 앞세워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바둑 최강국으로 군림했지만, 2010년 이후에는 중국에 일방적으로 밀려 숨도 못 쉬던 시절이 있었다.
LG배에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6년 연속 중국에 우승을 빼앗겼고, 삼성화재배에선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에 아홉 번 우승컵을 내줬으며 2015년부터 2020년까지 6년 연속 중국 기사의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최근 흐름이 바뀌고 있음이 감지된다. 신진서와 신민준이 중국의 '인의 장막'을 뚫고 2년 연속 LG배 우승컵을 가져왔고, 7년 동안 한 번밖에 이겨보지 못한 농심신라면배에서도 지난해 신진서가 탕웨이싱, 이야마 유타, 양딩신, 이치리키 료, 커제를 잇달아 꺾고 5연승으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마지막에 대기하고 있던 박정환의 출전이 필요 없을 정도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국 바둑의 의미 있는 진전에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 위빈은 “최근 한국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흐트러졌던 집단 연구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새로운 얼굴 발굴에 주력한다면 중국은 다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환-커제, 변상일-미위팅, 신민준-양딩신, 신진서-이치리키 료가 대결하는 LG배 8강 대진을 두고 국내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한국의 우위를 점친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분석했다.
“8강에 진출한 기사들은 모두 톱클래스 반열에 오른 기사들이기 때문에 승부를 예측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흐름을 봐야 하는데 중국의 커제나 양딩신, 미위팅을 두고 앞날이 기대되는 기사들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들은 이미 정점을 찍었거나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쪽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반면 한국 기사들의 경우 신진서, 신민준은 기량을 떠나 나이로 봐서도 이제 시작이다. 변상일은 최근 욱일승천의 기세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기사다. 또 박정환은 나이는 가장 많지만 최근 국제대회 14연승 등 마치 지난해 신진서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전성기 기량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국 바둑은 특출한 1, 2인에 의존해 중국에 대항했는데 이젠 수적으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 더욱 고무적이다.”
한국 기사들의 상승세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올해 중국리그에 한국 기사들은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이동훈, 신민준, 김지석, 강동윤 등 7명의 기사가 출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7라운드까지 총 23승 12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주장전 성적은 12승 6패다. 이중 박정환, 김지석은 5전 전승, 변상일은 4승 1패 등 출전 선수 전원이 각 팀 주장으로 뛰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LG배 8강전은 11월 7일 속개되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8월 열릴 예정인 2021 삼성화재배에서도 한국 기사들의 상승세가 이어질지도 주목된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