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원인 40%는 남성에 있어…정액검사 수가 개선하고 인식 바꿔야
이 씨처럼 남성 난임으로 고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난임은 피임 없이 1년 이상 성생활을 한 뒤에도 임신이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나라 부부 7쌍 가운데 1쌍은 난임을 겪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남성 난임 환자는 2015년 5만 3980명에서 2019년 7만 9251명으로 5년간 약 47% 급증했다. 같은 기간 여성 환자는 16만 2083명에서 14만 5492명으로 10.2% 감소한 것과 대조된다. 만혼에 흡연과 음주, 스트레스 등 다양한 요인이 원인으로 꼽힌다.
#난임, 여성만의 문제?
난임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풍조는 여전하다. 하지만 부부 사이 난임 책임의 절반은 남성에게 있다는 게 정설이다. 의학계에서는 난임의 원인이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40%씩 있다고 본다. 남녀 모두의 문제인 경우는 20%다. 난임의 절반 정도는 남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인식 때문에 난임의 진짜 이유를 찾는 시간이 지체되고, 여성들이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시술을 받게 된다는 데 있다. 한양대학교 서울병원 비뇨의학과 조정기 교수는 서울시의회 주최 ‘남성 난임 개선 토론회’에서 “남녀가 거의 비슷한 원인을 제공하는데도 난임 검사와 치료가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있다. 남성 난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씨 사례도 30대 중반에 들어선 뒤 시가로부터 임신 압박을 받은 경우다. 이 씨는 시가 어른들이 난자를 ‘밭’ 정자를 ‘씨’에 비유해 ‘밭이 문제’라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운동을 즐기는 건장한 남편보다는 체력이 약한 자신이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정액 검사 필수인데…편견이 장벽
비뇨의학과에 대한 인식 문제도 한몫한다. 비뇨의학과는 생식기 질환이나 성병이 있는 사람만 찾는다는 편견이 있다. 이 때문에 남성이 비뇨의학과에서 임신 준비를 하고 의료적 조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생소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두 돌 아들을 키우고 있는 40대 초반 하 아무개 씨는 아직도 4년 전 정액검사를 하던 순간이 생생하다고 말한다. 정액검사는 비뇨의학과 한쪽에 마련된 영상 방에서 혼자 정액을 채취해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 씨는 얇은 벽 너머로 환자를 호명하는 소리나 발소리 등이 들려 민망했다면서도 “나팔관 조영술까지 한 아내를 생각해 견뎠다. 오히려 ‘내가 난임일 수 있으니 검사를 받자’고 마음먹는 게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정액 검사는 정자 수와 정상정자 비율 등 남성 가임 능력을 확인하는 기초적인 검사다. 2~3일 동안 성생활을 하지 않은 채로 병원에 와서 정액을 모으는 방식이다. 남성 난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다.
#남성 난임 조기 발견은 요원…인식 전환해야
전문가들은 남성 난임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난임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남성 난임에 대한 비뇨의학과적 치료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헛발질’만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한비뇨의학과의사회 민승기 부회장은 “남성 난임의 원인이 다양한데도, 산부인과 위주의 난임센터에서는 남성의 비뇨의학과적 병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시험관 시술 등 보조생식술을 추천한다. 중간 과정이 생략된 셈이다. 비용은 비용대로 높아지고 정확한 원인 파악이 선행되지 않아 성공 확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정자의 숫자가 적거나 운동성이 낮은 ‘감정자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비뇨의학과 치료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사례가 잦다. 젊은 남성의 약 15% 정도에서 발견되는 ‘정계정맥류’ 역시 치료를 받은 뒤 자연임신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남성 난임을 조기에 인지한다면 여성들에 대한 과잉 진료나 시술을 막고, 난임 부부 시술비 지원 사업으로 인한 정부 부담도 덜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정액 검사 수가 체계 재정비가 거론된다. 30분 이상 소요되는 검사의 수가는 현재 의원급에서 5420원이다. 본인 부담은 1800원 수준이다. 독립 공간과 영상 시스템 등의 설비도 필요한데 투자 대비 수익이 나지 않다 보니 정액 검사를 시행하지 않는 병원도 많고 홍보도 부족한 실정이다.
민승기 부회장은 “남성들이 선제적으로 비뇨의학과를 찾아 정액 검사를 한다면 불필요한 시술을 줄일 수 있다. 정확한 원인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임신 가능성 제고를 기대할 수 있다. 사회적 비용 절감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기민 한양대 보건학 교수는 “현재의 저출산 대책은 복지 정책 위주다. 하지만 이제는 낳고 싶지만 낳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집중해야 한다. 남성 난임의 문제를 공론화해, 의학적인 대응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인식 변화에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은경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