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오컬트 도전 ‘도끼 든 스님’ 비현실적 캐릭터 호기심…“장르 영화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저는 공포 영화를 무서워하고 잘 못 보는 편이에요. ‘손님’을 촬영할 땐 그런 장르의 영화라고 생각을 안 했었고, ‘고양이’ 때는 큰 의지를 갖고 한 건 아니고 제작하신 분이 부탁해서 한 거였어요(웃음). 본격적으로 오컬트란 장르를 하게 된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인 거죠. 제가 오컬트 영화에 크게 관심이 있거나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번 작품을 하고 나서 ‘이런 장르 영화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작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에도 좋은 기회가 온다면 또 해보고 싶네요.”
호러, 또는 호러가 가미된 스릴러 장르로 나눈다면 이성민의 최신작 ‘제8일의 밤’은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과 ‘손님’에 이어 세 번째 도전이다. 그러나 오컬트라는 또 다른 특수 장르로 접근한다면 첫 도전이었다. 평소 큰 관심이 없었던 장르에 갑작스럽게 뛰어들게 된 데엔 이런 ‘비현실적인’ 지점에 대한 호기심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진수라는 캐릭터가 스님인데 도끼를 들고 있다는 게 굉장히 판타지 같잖아요? 사실 캐릭터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게 이런 지점 때문이었어요. 이렇게 명확한 캐릭터성을 가진 작품을 앞으로 더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죠. 진수를 보면 미국 영화 ‘콘스탄틴’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8일의 밤’을 통해서 한국적인 (콘스탄틴 같은) 그런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좀 했고(웃음).”
7월 2일 넷플릭스로 공개된 영화 ‘제8일의 밤’에서 이성민은 파계의 길을 걷게 된 전직 승려 진수 역을 맡았다. 승려였다는 과거가 무색하게도 살생을 저질러야 하는 숙명 앞에서 깊이 번민하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까지 매체에서 봐 왔던 승려들의 스테레오 타입과도 독특한 차별점을 보여준다. 세상에 지옥을 불러들일 ‘깨어나선 안 될 것’을 막기 위한 퇴마의 중심에 서 있는 진수의 모습은 이성민의 말마따나 판타지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신선하다. 이제까지 그가 맡아온, 어느 가정집 문을 열더라도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닌 캐릭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다.
“‘제8일의 밤’을 찍고 나서 장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아졌어요. 판타지 영화에서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해보는 게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진수도 그런 캐릭터라고 이해하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진수를 보면 초반 40분 동안 말이 없는데 그게 굉장히 좋았어요. 대사 칠 게 없어서(웃음). 한편으론 그 말 없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연기를 더 해야 했는데 감독님과 그런 지점에서 고민을 참 많이 했었죠.”
현실에서 비현실로 눈을 돌리게 된 데엔 우연히 본 유튜브의 ‘양자역학 강의’ 영상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고. 이전 인터뷰에서 이미 한 차례 ‘이성민의 양자역학 강의’를 했던 차에 비슷한 질문이 나오자마자 “물어봐 주셔서 감사하다. 재미있고 길게 얘기해 볼까”라며 웃음부터 터뜨리기 바빴다. 이어 이성민만의 철학이 가미된 양자역학 2차 강의가 시작됐다.
“저는 사실 물리학에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강의를 보다가 접하게 됐어요. 그걸 통해서 양자역학을 알게 되고, 원자를 알게 되고, 우리가 우주의 별 만큼이나 많은 원자로 이뤄진 것을 알게 됐죠. 우주가 얼마나 큰지,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지(웃음), 만일 꽃도 원자로 돼 있다면 원자 본연의 모습을 보는 사람은 그걸 어떻게 바라볼까 상상도 해보고.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과 아예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등의 상상을 하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웃음). ‘제8일의 밤’도 악령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만일 다른 차원을 보거나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재미있겠다 하던 찰나에 진수가 그런 비슷한 캐릭터라서 더 흥미를 가진 것도 있어요.”
이처럼 영화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뤘지만 스크린 밖의 이야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드라마 ‘미생’에서처럼 젊은 배우들과의 깨알 같은 케미스트리로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성민은 ‘제8일의 밤’에서도 상대역인 남다름(청석 역)과 좋은 시너지를 보여줬다. 때로는 아빠처럼, 또는 큰형님처럼 안정적인 케미를 보여주며 대중들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그만의 비법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웃음). 제가 늘 연기를 이야기할 때 이건 ‘앙상블’이라고 말해 왔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중요하다고도 생각하고요. 제가 만나는 배우들마다 그런 앙상블을 만들어 내는 좋은 배우들이었어요. 그래서 호흡이 좋았었고, 그랬기에 대중들도 더 그렇게 느끼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웃음). 사실 전 촬영할 때 후배 배우들과 어떤 거리감이라든지 벽을 잘 못 느꼈었거든요. 후배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도 아마 (케미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웃음)”
이렇게 후배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편안하고 잔잔한 케미를 만들어 내는 이성민은 올해로 데뷔 36년 차를 맞이하고 있다. 양자역학 강의를 들으며 인간은 한낱 우주의 티끌이란 것을 깨닫고, 영화에서 말하는 번민과 번뇌를 벗어나기 위해 자성하면서 인간의 100년 삶도 그저 풀싹에 불과하다는 고찰을 거듭하게 된 것도 겹겹이 쌓여 가는 세월 속에서 그가 찾아낸 성찰의 방법이지 싶다.
“제가 나이가 이제 꽤 많은데 앞으로 살 시간보다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을 거예요. 모래시계로 따지면 모래의 반 이상이 밑으로 내려온 상태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데 아직 정리를 못 했어요. 그런데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명확해진 게 있다면 생이란 풀싹 같은 것이란 것이죠. 눈앞에 있는 것보다 좀 더 넓게 보니까 내가 한 없이 별 것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고요. 나의 인생 백 년은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하루살이의 하루라는 말을 들었는데, 결국 내 인생은 다 찰나일 뿐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고통스럽게 살지 않고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앞으로 남은 내 삶의,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나의 모습인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