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버리 만들자” 최민정과 충돌 후엔 “후련”…승부조작 입증 쉽지 않아 징계엔 시간 걸릴 듯
#평창올림픽 기간 있었던 일
'디스패치'의 지난 8일 보도로 공개된 이들의 메신저 대화 시점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대회 기간이다. 심석희와 A 코치는 500m와 3000m 계주에 나선 팀 동료 최민정과 김아랑을 조롱하는 듯한 대화를 나눴다. 최민정과 경쟁하던 중국 선수를 응원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가 하면 자신과 함께 계주경기에 나선 김아랑과 최민정의 경기력을 비난하기도 했다. 여자 대표팀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냈지만 심석희는 "실격이어야 했다. 창피할 정도"라고 폄하했다. 대화 상대인 코치 또한 이에 동조했다.
더 큰 충격을 안긴 내용도 있다. 이들의 대화 중 과거 호주 쇼트트랙 선수인 스티븐 브래드버리의 이름이 언급됐다. 브래드버리는 쇼트트랙계에서 '어부지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1994 릴레함메르,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연이어 참가했지만 개인전 메달은 획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퇴를 앞둔 상황에서 나선 2002 솔트레이크올림픽, 1000m 결승에 어렵게 진출한 브래드버리는 당시 현격한 차이로 최하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선두 싸움을 벌이던 4명의 선수가 동시에 넘어지며 행운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심석희와 A 코치는 '브래드버리 만들자'는 대화를 반복했다.
'사고'는 여자 1000m 경기에서 나왔다. 심석희는 앞서 열린 500m와 1500m에서는 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1000m에서는 최민정과 함께 메달 색이 결정되는 결승전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경기 막판 충돌로 넘어지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마지막 한 바퀴 반을 남겨둔 상황까지 심석희는 4위, 최민정은 5위로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고 한 바퀴를 남겨둔 시점 동시에 아웃코스로 추월을 노리다 충돌했다. 심석희는 실격을 받았고 최민정은 최종 4위를 기록했다. 경기 후 A 코치는 "후련하겠다. 최고였어"라는 말을 남겼고 심석희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쇼트트랙 여자 1000m는 3000m 계주와 함께 한국 대표팀의 주종목으로 통해왔다. 역대 일곱 번 올림픽의 1000m 종목에서 한국 대표팀은 4개의 금메달을 가져왔다. 심석희는 2014년 소치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당시 박승희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여자 1000m는 우리나라의 메달 획득이 예상된 종목이었다. 심석희와 최민정은 나란히 결승에 오르며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이들은 충돌로 각각 실격과 4위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경기 전에 '브래드버리 만들자'라는 대화가 오간 데다 경기 후 대화까지 밝혀진 상황에서 '고의 충돌'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은밀한 대화는 어떻게 세상으로 나왔나
사생활 영역인 메신저 대화 내용은 어떻게 유출됐을까. 메신저 대화 유출 배경에는 조재범 전 코치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 전 코치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로 쇼트트랙 대표팀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올림픽 개막을 눈앞에 두고 심석희를 코칭하는 과정에서 폭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조 전 코치는 빙상연맹에서 영구제명됐고 법의 심판도 받았다. 결국 2회의 재판을 통해 조 전 코치는 폭행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심석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성폭행 피해도 호소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 온 제자와 코치 간 성폭행에 대중은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또 체육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폭행 혐의와 별개로 이후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 항소심까지 치러졌고 조 전 코치에게 징역 13년이 선고된 상황이다.
심석희와 A 코치 간 대화 내용은 조재범 전 코치가 본인의 재판 과정에서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수사기관이 심석희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에서 나온 자료를 조 전 코치가 대중에 공개한 것이다.
빙상계 한 관계자는 "조 전 코치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면서도 "이전부터 그는 일부 억울함을 호소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선택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만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어떤 '액션'을 취한 것인데 유리한 판결이 나오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국대 박탈? 연금회수? 빙상연맹 징계 수위는
공개된 대화의 기간은 올림픽 기간 중 2주 남짓, 길지 않은 몇 마디였지만 파장은 매우 크다. 심석희와 최민정은 각각 소속사를 통해 입장을 냈다. 심석희는 사과의 뜻을 전했고 최민정 측은 빙상연맹 등에 철저한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최근 대표팀은 ISU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촌에 소집돼 훈련 중이었다. 파문의 중심에 있는 심석희를 비롯, 대화 중 언급된 최민정, 김아랑 모두 이번 시즌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빙상연맹은 이들이 같이 훈련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일단 심석희를 선수촌에서 퇴소시켰다. 심석희는 코앞으로 다가온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빙상연맹은 조사위원회를 꾸리는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빙상계 핵심 관계자 등에 따르면 구체적 위원회 인사들의 윤곽도 나오고 있다.
동료 선수 뒷담화, 경쟁국 선수 응원, 승부조작 의혹 등이 있는 심석희에 대해 중징계가 내려질지는 미지수다. 일부에선 심석희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에 그간 획득한 메달 박탈, 연금 환수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다.
빙상계 다른 관계자는 "외부에서 바라보듯 징계 수위가 높을 것이라 확신하기 어렵다"면서 "승부조작 의혹은 추가적인 증거가 확보돼야 징계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대화 내용으로는 확신하기 어렵다. 과거 유사한 사례가 있을 때도 심증은 확실했지만 결국 조작 등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징계가 내려지지 않고 선수가 의지를 보인다면 심석희가 내년 2월 열리는 올림픽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빅토르 안(안현수)의 아버지이자 2018년 빙상발전TF 위원 등 빙상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 온 안기원 씨는 "의혹은 있지만 그 대화만으로 연맹이 승부조작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평창올림픽 이전에 있었던 최민정에 대한 승부조작 제의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라며 "최민정 선수 측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연맹 고위층으로부터 '심석희에게 양보하라'는 제의가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빙상연맹의 오랜 '관행'과 같은 것이다. 좋은 기량을 가진 최민정이 한체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입학했고 '그들'의 라인이 아닌 다른 팀에 입단해 보복을 가한 것이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에서 '짬짜미'가 부각되지만 국내 대회나 대표 선발전에서는 여전히 매번 일어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승부조작 건에 대한 징계가 쉽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던 앞서의 빙상계 관계자는 심석희의 동료 뒷담화 등과 관련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그는 "조 전 코치 측이 공개한 문건 앞부분은 대부분 심석희의 '사생활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선수의 사생활에 대해 조사위원회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건"이라며 "다만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된 것 외에 더 은밀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부분도 연맹이 확보했다고 들었다. 대표팀 훈련 기간 중이나 대회 중 일어난 일이라면 연맹이 징계를 내릴 명분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지목된 한 연맹 관계자는 징계가 결정되는 시점에 대해서는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보인다. 10월 중순을 넘기지 않을까"라고 전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