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3연패 달성 경기 생생…레버쿠젠 입단했다면 어땠을까”
고정운 감독은 건국대학교 졸업 이후 1989시즌 일화 축구단에 입단, 데뷔 직후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골과 도움을 고루 기록하는 측면 자원이었다. 1990년대 중반 전성기를 보내며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1994 미국 월드컵에 진출했고 일화의 K리그 3연패에 기여했다.
일화에서 우승을 달성하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도 스페인, 독일 등 세계적 강호를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이자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해외 무대에서 고 감독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팀은 독일 분데스리가 명문 레버쿠젠이었다.
"1994년에 월드컵이 끝나고 일화도 우승을 했다. 당시엔 에이전트가 없어서 차범근 감독을 통해 연락이 왔다. 시즌이 끝나고 우승을 기념해 팀이 단체로 유럽 여행을 간 자리에서 협상이 이뤄졌다. 이적료 100만 마르크, 5억 원 정도였고 연봉은 3억 원 정도였다. 결국 구단에서 허락을 안해줘서 이적은 무산됐다. 그 때 갔으면 축구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느정도 협상이 진행됐던 독일 이적설과 함께 잉글랜드 무대 이적설도 당시 존재했다. 이에 고 감독은 "잉글랜드 쪽은 레버쿠젠과 달랐다. 언론상에 이야기만 있었을 뿐 나나 구단 쪽에 직접적인 제안은 없었다. 실체가 없는 이야기였다"고 설명했다.
독일 진출이 무산된 이후 1995년에는 일화의 K리그 3연패가 완성됐다. 고 감독은 3연패를 결정짓는 챔피결정전 3차전을 선수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기도 했다. 당시 일화는 포항과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었다. 3차전은 예정에 없던 경기였다. 홈앤어웨이로 1, 2차전이 진행됐지만 무승부만 2경기가 나왔고 중립지역인 안양에서 3차전이 열렸다.
고 감독은 "당시 모든 축구 전문가나 팬들이 포항의 우승을 예상했다. 최고의 외국인 선수 라데를 포함해 황선홍, 홍명보 등 국가대표 선수가 다수 포진된 포항이었다. 나를 포함해 신태용, 사리체프, 이상윤 등이 있는 일화가 대등하게 싸웠다. 굉장히 치열했던 경기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라며 "3차전에서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서 내가 전반에 오른쪽 측면을 돌파해 크로스를 올렸는데 이상윤이 정확히 파고들어 머리로 골을 넣었다. 그렇게 3연패가 완성됐다"고 설명했다.
마침 이날 인터뷰 현장에는 이상윤 해설위원이 동석했다. 1년 차이 축구계 선후배(고 감독이 선배)인 이들은 같은 대학, 프로팀, 국가대표팀에서 동고동락하며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다. 일화의 3연패를 합작한 결승골에는 '건대 크로스'라는 이들만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고 감독은 "상윤이가 위치를 잘잡았다"고 했지만 이상윤 해설위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 때 크로스를 올리는 위치가 어려운 위치였다"면서 "그런데 공을 잡은 사람이 고정운 형님이었기에 공이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국대 시절 특히 훈련을 많이 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비를 앞에 두고 하는 크로스를 우리는 '건대 크로스'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독일 이적은 무산됐지만 K리그 3연패를 달성한 고 감독은 1997시즌을 앞두고 일본 J리그 무대로 진출했다. 당시로선 K리그에서 뛰던 선수가 J리그로 이적한 최초의 사례였다.
고 감독은 "당시 J리그 진출을 좋지 않게 보는 풍토가 있었는데 구단에도 나에게도 좋은 제의가 와서 일본에 가게 됐다. 2년동안 뛰었는데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금전적으로 괜찮았나"라는 물음에 그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에서 7~8년 활약한 것보다 그 때 2년이 더"라며 말끝을 흐렸다. "1년만 더 뛰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일본무대에서 국내로 돌아오면서 그는 포항 유니폼을 입었다. 포항에서 40-40 클럽에 가입하는 등 활약을 이어가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다양한 무대에서 활약했지만 그는 '일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구단이 운영을 포기하고 시민구단 형태로 변모하며 당시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어지고 있는 현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은 우리 잘못이고 내 잘못이다. 나는 일화가 창단되고 처음 입단한 창단멤버였다. 내가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면 팀이 달라졌어도 현재까지 그 때를 추억하는 분들이 많았을 수도 있다. 럭키금성(현 FC 서울) 출신 선수들은 지금까지도 가끔 모임을 가지고 하는 것이 참 보기 좋다. 당시 팀의 전통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구단의 선택들도 아쉽다. 주축 멤버 중 일화에서 온전히 은퇴한 선수들이 많지 않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