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기간 못 채우고 물러나, 사장·단장도 동반 퇴진…‘리빌딩’ 한화 수베로 ‘재정비’ 롯데 서튼 내년 시즌 주목
국적보다 더 관심을 모은 건 윌리엄스 감독의 경력이었다. 그는 현역 시절 MLB에서 17년을 뛰면서 1866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8, 홈런 378개, 1218타점을 올린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5차례 올스타에 뽑혔고, 4차례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를 수상했다.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지도자가 된 뒤에는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으로 통산 179승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내셔널리그 올해의 감독상도 받았다. 그런 그가 한국의 KIA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해외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을 정도다.
하지만 KIA는 지난 두 시즌을 윌리엄스 감독과 함께한 뒤 남은 1년을 함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KIA는 11월 1일 "윌리엄스 감독과 상호 합의를 통해 계약을 해지했다. 올 시즌 성적 부진에 관한 책임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이같이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KBO리그 역대 사령탑 중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던 윌리엄스 감독은 그렇게 2년 만에 한국을 떠나게 됐다.
#'와인 투어' 1년 내내 화제였지만…
윌리엄스 감독의 첫 시즌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KIA는 2020년 정규시즌 6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래도 73승 71패로 승률 5할을 넘기는 데 성공했다. 시즌 내내 부상자가 속출했는데도 2019년(62승 2무 80패)보다 11승을 더 올렸다. 윌리엄스 감독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다. 조계현 KIA 단장은 특히 윌리엄스 감독의 '소통' 능력을 높이 샀다. 선수들은 "감독님이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신다"고 입을 모았다.
그라운드 밖에서 훈훈한 장면도 연출했다. 각 구단과 감독 이름을 새긴 와인 케이스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칠레산 레드와인을 넣어 다른 팀 사령탑들에게 선물했다. 이른바 '와인 투어'였다. 다른 감독들이 이 선물에 화답하는 '답례 투어'까지 이어지면서 1년 내내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성적이 나와야 감독에 대한 호평도 유지될 수 있다. 어느 감독이든 두 번째 시즌엔 첫 시즌보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커지는 것도 당연하다. 윌리엄스 감독은 그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 KIA는 올 시즌 58승 10무 76패를 기록해 9위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윌리엄스 감독은 역대 외국인 감독으로는 최초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 외국인 감독도 그가 처음이다.
앞서 다른 외국인 감독들이 이룬 성과는 윌리엄스 감독의 KBO리그 입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름값이나 경력이 윌리엄스 감독에 못 미치는 데도 그랬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빅리그에서 16년 동안 타율 0.249, 홈런 40개, 352타점을 올렸고, 트레이 힐만 전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전신) 감독은 MLB 162경기에 나서 타율 0.179에 그친 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2008년 KBO리그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 3시즌 동안 팀을 매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았다. 특히 부임 첫해에는 7년간 가을 야구를 하지 못한 롯데를 준플레이오프(준PO)로 이끌면서 부산에 '로이스터 신드롬'을 일으켰다. 힐만 감독도 2017년 SK 지휘봉을 잡은 뒤 2018년 정규시즌을 2위로 마쳤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 우승까지 차지했다. 역대 유일하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외국인 사령탑이다. 이 때문에 윌리엄스 감독이 이끈 KIA의 성적은 더 대조적이다.
높아진 기대치에 반비례해 전력은 약화된 게 사실이다. KIA는 윌리엄스 감독이 부임한 뒤 외부 자유계약선수(FA)를 영입하지 않았다. 지난해 에이스였던 양현종은 MLB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중심 타자 최형우와 외국인 타자 프레스턴 터커가 부진하면서 공격력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고려해도 "윌리엄스 감독이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성적과 리빌딩 사이에서 명확한 노선을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한 베테랑 해설위원은 "올 시즌 KIA의 문제는 전력 공백이 아니라 방향성의 부재다. 젊은 선수의 성장을 유도하려는 노력도 작년보다 부족해 보였다"고 분석했다.
#구단의 실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윌리엄스 감독과 KIA의 결별은 예견됐던 수순이다. 다만 대표이사와 단장까지 함께 물러난 건 예상 밖 '사건'이었다. KIA는 윌리엄스 감독의 퇴진을 발표하면서 "이화원 대표와 조계현 단장도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동반 사의를 표명했다. 숙고 끝에 수용했다"고 전했다. 조계현 단장은 지난해 말 KIA와 계약을 2년 연장하면서 구단의 신뢰를 받았는데, 갑작스럽게 팀을 떠나게 돼 더 놀라움을 안겼다.
포스트시즌 탈락 팀이 오프시즌에 수뇌부를 교체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감독과 사장, 단장이 동시에 물러난 건 매우 이례적이다. 모기업이 야구단의 총체적 위기를 인정하고 방향성을 다시 설정하려는 움직임으로 여겨진다. 신임 대표이사로는 기아 광주총무안전실장과 노무지원사업부장 등을 역임한 최준영 현 기아 대표이사 겸 경영지원본부장이 내정됐다. KIA 구단은 조만간 이사회를 열고 대표이사에 최준영 부사장을 임명할 예정이다. 최 내정자는 KIA 타이거즈 대표이사와 기아 대표이사를 겸직하게 된다.
실제로 올 시즌 KIA가 9위로 처진 데는 감독뿐 아니라 구단의 실기도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KIA는 지난 시즌 종료 후 퓨처스(2군) 감독직을 없애고 윌리엄스 감독에게 1군과 2군 운영권을 모두 맡겼다. 당시 KIA는 "윌리엄스 감독에게 선수 육성 책임까지 부여해 1군과 퓨처스 선수단을 통합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단은 1군을 감독이 통솔하고, 2군은 구단이 구축한 시스템에 따라 운영한다. 1·2군이 수시로 소통하며 유기적으로 팀을 끌고 가는 것과 1군 감독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야구계는 "단기 성과를 내야 하는 감독, 그것도 KBO리그 2년째인 외국인 감독에게 미래를 위한 육성까지 맡기는 건 구단 수뇌부의 직무유기"라는 평가를 내놨다.
심지어 구단이 큰돈을 들여 야심차게 영입한 윌리엄스 감독은 당초 기대했던 'MLB식 선진 야구'가 아니라 '올드 스쿨' 방식의 경기 운영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수단 안팎 상황도 좋지 않았다. 별다른 전력 보강이 없는 상황에서 구단이 주도한 트레이드와 방출 선수 영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효자'로 여겨졌던 외국인 투수 에런 브룩스는 대마초 성분이 있는 전자담배를 구입했다가 적발돼 전열을 이탈했다. 삼박자가 모두 어긋난 시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시즌 중반 이후에는 윌리엄스 감독과 구단(사장, 단장) 간 불화설까지 흘러 나왔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갈등은 봉합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BO리그에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윌리엄스 감독과 그에게 전권을 남긴 구단 수뇌부가 모두 물러나고 KIA는 제로베이스에서 다음 시즌을 준비하게 됐다.
프런트와 현장의 리더가 모두 바뀌면서 KIA의 오프시즌 행보를 향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KIA는 당장 한국으로 유턴한 전 에이스 양현종과 FA 계약 협상을 앞두고 있다. 이번 스토브리그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전임 대표와 단장이 "양현종 협상을 1순위로 두겠다"고 선언한 지 얼마 안 돼 모두 물러났다. 대표이사 선임 후 새 단장이 결정될 때까지 양현종 협상 준비도 미뤄질 공산이 크다. 굵직한 '대어급' FA가 많이 나오는 올겨울 시장에서 KIA가 어떤 자세를 취할지도 흥미롭다. 2017시즌 통합 우승 뒤 내리막길을 걷던 KIA가 대대적인 변화와 쇄신의 첫걸음을 뗀 모양새다.
#수베로와 서튼의 내년 시즌 운명
스타 출신인 윌리엄스 감독의 중도 퇴진과 함께 외국인 사령탑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질지도 관심거리다. 올해 KBO리그는 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 세 명이 팀을 지휘했다.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이글스 감독과 래리 서튼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다.
수베로 감독은 올 시즌을 앞두고 한화와 3년 계약을 했다. 지난해 뼈아픈 최하위 아픔을 겪은 한화는 "이 기간 동안 팀 육성 시스템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수베로 감독은 2001년부터 15년간 마이너리그 감독생활을 하면서 유망주 발굴과 선수 육성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지도자다. 윌리엄스 감독과 양 극단을 이루는 경력으로 더 관심을 모았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MLB 밀워키 브루어스 1루와 내야 코치를 맡았는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팀 리빌딩 과정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화는 이례적으로 대럴 케네디 수석코치, 호세 로사도 투수코치, 조니 워싱턴 타격코치를 수베로 감독과 함께 영입하면서 신뢰와 기대를 표현했다.
첫 시즌 성적은 예상대로였다. 한화는 올해도 최하위에 그쳤다. 지난해 46승보다 3승을 더 하긴 했지만, 승률 0.371로 10개 팀 중 유일하게 4할 승률을 넘지 못했다. 아무리 최하위를 각오로 시작한 시즌이라 해도 실제 '꼴찌' 자리를 확인하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면 리빌딩'을 선언한 한화가 주전으로 활약하던 베테랑 선수를 대거 내보내고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받아든 성적표라 비난의 화살을 피했다. 파격적인 시프트로 수비 효율을 끌어 올리고 주루사와 도루 실패를 감수하는 공격적인 베이스러닝을 펼친 점도 "이전의 한화에서 볼 수 없는 야구였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베로 감독 스스로도 "야구 환경과 문화, 언어가 모두 새로운 곳에서 불확실한 1년을 보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는데,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던 것 같다"며 "리빌딩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우리가 당초 구상한 계획대로 어느 정도 이뤄냈다. 선수들이 감독의 야구관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도를 높여가는 과정은 만족스럽다. 적어도 1년차에 계획한 것은 다 이뤄냈다"고 자평했다.
수베로 감독은 다음 시즌에도 한화를 지휘한다. 구단도 숙제였던 '리빌딩'에 성공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내년 시즌에도 최하위권을 맴돈다면 남은 계약기간을 다 채운다는 보장은 없다. 한화가 올해 말 외부 FA 영입을 통해 전력의 주축이 될 선수를 뽑는다면, 리빌딩의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또 다른 외국인인 서튼 감독은 윌리엄스 감독이나 수베로 감독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사령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05~2007년 현대 유니콘스와 KIA에서 활약했던 KBO리그 외국인 타자 출신이다. 2005년엔 리그 홈런왕에도 올랐다. 은퇴 후 2014년부터 피츠버그 파이리츠 타격 코디네이터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캔자스시티 로열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타격 코치로 일하다 지난해 롯데 퓨처스(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지난 5월 11일 허문회 1군 감독이 전격 경질되면서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떠맡았다.
롯데는 시즌 도중 불러 올린 서튼 감독에게 '감독 대행'을 맡기지 않고, '신임 감독'으로 임명했다. 또 "서튼 감독이 그동안 2군 팀을 이끌며 보여준 구단 운영 및 육성 철학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세밀한 경기 운영과 팀 체질 개선을 함께 추구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언제 새 감독으로 교체될지 모르는 '대행' 꼬리표 없이, 차근차근 팀 기반을 다져나갈 토대를 만들어준 모양새다.
실제로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롯데는 허문회 감독 체제로 치른 30경기에서 12승 18패를 기록해 10개 구단 중 최하위로 처져 있었다. 성민규 단장과 허 감독의 불화설도 끊이지 않아 여론도 악화된 상황이었다. 서튼 감독은 진퇴양난에 빠진 팀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릴 구원 투수로 투입됐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서튼 감독 부임 후 롯데의 성적은 53승 5무 53패. 5할 승부를 했고, 시즌 막바지 5강 경쟁 팀들을 맹추격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외국인 감독이 지휘한 세 팀의 성적은 8~10위. '우승'을 목표로 영입한 9위 팀 감독은 팀을 떠나게 됐지만, '리빌딩'과 '재정비'를 숙제로 받은 8위와 10위 팀 감독은 일단 살아남았다. 내년 시즌도 한국에서 출발할 공산이 큰 수베로 감독과 서튼 감독이 KBO리그 외국인 사령탑 역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길지 관심이 모아진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