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보다 못한 라커룸 환경 후배 위해 쓴소리…내년 SSG와 동행? 아내와 아이들 생각 들어볼 것”
2000년 부산고 졸업 후 미국으로 향했던 그가 20년이 훌쩍 지나 마흔 줄에 접한 KBO리그는 어떤 느낌표를 안겨줬을까. 야구장 안팎에서 다양한 스토리를 양산해낸 SSG 랜더스의 추신수를 만났다. 곧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미국으로 출국 예정인 그는 올 시즌 SSG 선수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자신에게 큰 동기부여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일요신문이 추신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본다.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려 했던 추신수가 SSG 랜더스 유니폼을 입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존재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에 남아 있어야 할 가족들. 그럼에도 아내 하원미 씨의 응원을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추신수는 KBO리그에서 야구하는 데 대해 “기대가 70~80%, 걱정이 20~30%였다”고 말했다.
“한국의 응원 문화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컸다.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박수와 함성이 가득 찬 그곳에서 야구할 때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지방을 제외하곤 관중들을 만날 수 없어 굉장히 안타까웠다. 가끔은 팬들을 만날 수 있는 지방 원정 경기를 기다릴 정도였다. 많은 분들에게 사인해주고 싶었는데 KBO 방역 지침상 선수가 팬에게 직접 사인해주는 걸 금지한 부분이 아쉬웠다.”
추신수는 야구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응원가를 접했다. SSG 응원단장이 고심 끝에 만들어온 응원가를 듣고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내 응원가를 들어본 게 처음이었다. 나란 선수를 위해 기차 소리를 고르고 음악을 만든 후 수차례 수정 작업 끝에 완성본을 들고 온 응원단장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내 응원가보다 자꾸 (한)유섬이 응원가가 입에 붙어 매일 유섬이 응원가를 흥얼거리며 다닌 것 같다(웃음).”
SSG는 시즌 초반 상위권에서 선두를 달리며 기분 좋은 상승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선발 투수들이 잇달아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어느 순간 SSG는 선발 투수 부재로 힘든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1·2·3 선발 투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빠지고 외국인 선수인 폰트도 부상으로 2개월가량 결장했음에도 우리가 5강 싸움을 벌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20년 프로 생활을 하면서 선발 투수 모두 부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된 건 이번에 처음 경험한 일이다. 그래도 선수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해냈다는 게 대단한 것 같다. 우리 팀이 1위에 올랐을 때는 정말 기쁜 마음에 순위표를 캡처해 놓기도 했다.”
추신수는 선발진 붕괴로 불펜 투수들이 어려운 경기를 이어가는 걸 지켜보며 후배들을 위로한 일화를 소개했다.
“서진용, 장지훈, 최민준, 김태훈, 오원석 등 어린 선수들이 마운드에 올랐다가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그 모든 걸 자신의 책임이라고 탓하는 게 마음 아팠다. 그럴 때마다 오늘 패한 게 너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설령 끝내기 홈런을 맞아도 너 때문에 진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것도 패인이고, 다른 선수가 수비에서 실책한 것도 패인이기 때문에 모든 결과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 야구 오래하기 힘들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건 너와 나, 우리가 없었다면 우리 팀은 여기까지 못 왔을 거란 사실이다. 우리 때문에 이긴 경기도 많으니 절대 자신을 자책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적 후 전반기 때 좋은 모습을 보인 최주환이 후반기 들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일 때 추신수는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만났던 애드리안 벨트레가 자신에게 전한 조언을 떠올렸다.
“부진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삼진아웃 당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내게 벨트레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넌 대기타석에 있다가 타석으로 걸어갈 때부터 이미 그 투수의 공을 못 칠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라고 말이다. 자신은 30타수 무안타를 치고, 실책을 범해도 야구장에서 만큼은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한다고. 일어나지도 않은 결과를 놓고 굳이 다른 선수들, 팬들한테 위축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벨트레의 말에 크게 공감했는데 그 말을 똑같이 최주환에게 전했다. 우리는 이렇게 끝날 선수가 아니고, 지금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당당한 모습으로 타석에 들어서라고 말이다.”
추신수가 한국에 오면서 우려했던 몇 가지 부분들 중 야구장 환경이 포함됐다. 한국에서 뛰는 야구 선후배들을 통해 일부 야구장 시설이 낙후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도 보지 못한 환경들이 KBO리그에 존재했다. 나도 한국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면 이런 환경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미국에서 20년을 뛰고 온 터라 자연스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원정 팀 라커룸이 정말 열악했다. 야구장에 치료실은 물론 실내 배팅케이지가 없어 3시 30분에 야구장으로 출근하더라. 경기가 6시 30분에 시작하는데 말이다. 숙소에서 유니폼을 입고 야구 가방을 메고 버스에 오르면 야구장 도착 후 타격 훈련을 20번 정도 한 후 경기에 들어가는 것 같다. 야구는 경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료와 웨이트 트레이닝, 식사 등이 모두 루틴에 포함된다. 좋은 경기력을 보이기 위해 아침부터 몸을 만들고 경기 준비를 하는데 원정 중에는 이 모든 게 불가능하다. 처음엔 나도 조용히 있으려 했다. 메이저리그 출신이란 타이틀이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나라도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은 혜택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후배들을 위해서, 좀 더 멀리 본다면 후배의 자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야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야구장 시설 관련 쓴소리를 내뱉었다.”
추신수가 처음 목소리를 높인 건 잠실야구장 원정 라커룸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가 1·3루 클럽하우스를 쓰다 보니 원정팀 라커룸이 비좁고 선수들의 휴식 공간이 없는 상태다. 추신수의 강도 높은 비판 덕분에 잠실구장은 겨울 동안 리모델링이 예정돼 있다.
“한국 야구가 어느 순간부터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하락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게 선수들만의 잘못인지를 묻고 싶다. 그동안 선배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야구했고,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항변하겠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야구 인프라도 적극적인 변화를 꾀해야만 한다. 왜 우리는 시속 150km 던지는 투수가 많지 않고, 일본이나 미국처럼 엄청난 파워의 타자가 나오지 않는 건가. 프로야구 환경만 바꿀 게 아니라 야구의 전체적인 시스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밑에서부터의 체계적인 변화 말이다.”
추신수는 올 시즌 SSG 선수들에게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한 타석에서 공 5개 이상을 본 선수, 외야에서 애매한 뜬공이 나왔을 때 서로 미루지 않고 잡는 선수, 출루를 많이 하는 선수 등등 좋은 경기를 위해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한 선수에게 아낌없는 선물을 제공했다. 그 선물의 내용은 공개하기 어렵다고 한다.
“야구는 1층부터 9층까지 얼마나, 어떻게 튼튼하게 짓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1번부터 9번까지 상대 투수의 공 3개에 아웃당한다면 공 1개를 더 보고 아웃 당하자고 말했다. 그건 공 4개를 보는 건데 그럴 경우 1번부터 9번까지 공 9개가 늘어나는 셈이다. 그걸 두 번만 하면 상대 선발 투수의 투구 수가 18개가 늘어나는 것이고 1이닝 더 빨리 강판될 수 있다. 내가 레고를 좋아하는 이유가 작은 조각들이 모여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야구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선수가 홈런이나 안타를 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 출루해야 이기는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SSG 랜더스와 계약을 맺으며 KBO리그를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닌 우승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던 추신수. SSG는 올 시즌 5강 문턱에서 좌절한 터라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에게 내년 시즌도 SSG와 동행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미국 가서 가족들과 대화를 더 해본 후 최종 결정할 것이다. 내 의견도 중요하지만 아내와 아이들 생각도 들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