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왕조’ 막내에서 기둥으로…“시즌 앞두고 타격폼 전면수정, 홈런은 체중과 관계 없더라”
2016년부터 가을만 되면 남의 집(팀) 잔치를 TV로 지켜봐야 했다. 찬란했던 왕조의 역사를 이어가기는커녕 지난 시즌까지 팀은 정규리그 순위 9-9-6-8-8이란 숫자를 찍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시청자가 아닌 주인공이 돼 포스트시즌 무대를 누비는 꿈을 꿨다.
올 시즌 데뷔 7년 만에(군 복무 기간 제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쥔 구자욱(28)은 화려한 성적표를 받았다. 데뷔 후 처음으로 20홈런-20도루를 달성했고, 개인 통산 1000안타, 7년 연속 200루타, 데뷔 통산 100도루 등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올 시즌 139경기에 출장해 타율 3할 6리(543타수 166안타) 22홈런 88타점 107득점 27도루를 거뒀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도 타율 4할 2푼 9리(7타수 3안타) 1홈런 2타점 3득점으로 고군분투했다. 사연 많은 2021시즌을 보내고 시상식과 행사들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구자욱을 대구 라이온즈파크에서 만났다.
―‘포스트 이승엽’의 이미지가 남아 있는 선수인데 어느새 프로 10년차 베테랑 선수가 됐습니다.
“아직 ‘베테랑’이란 단어는 실감 못하고 있어요. 팀에 선배들이 더 많아 베테랑, 고참이란 느낌은 없거든요.”
―2012시즌 프로 데뷔 후 이듬해 상무 입대를 했습니다. 만 22세에 군필 선수가 돼 2015년 복귀했었죠. 2015시즌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마무리한 후 팀은 하위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시간들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정말 힘들었어요. 주위의 기대도 기대지만 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였죠. 점점 자신감을 잃었고 위축됐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생각을 바꿨어요. 야구를 죽기 살기로만 하지 말고 가끔은 즐기는 여유도 갖자고요. 야구가 원래 놀이로 시작했잖아요. 그 놀이를 전쟁터에서 전쟁 치르듯 싸우려고만 했는데 책임감, 부담감 등을 내려놓고 재미있게 야구 하자고 생각했더니 점점 나아지더라고요.”
―사실 2019년 딱 한 시즌을 제외하곤 계속 3할 타율 이상을 기록했어요. 그러면 잘한 거 아닌가요?
“제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 같아요. 더 잘해야 한다고,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는 편이거든요. 제게 선물을 줘야 하는데 항상 물음표만 던졌어요. 그러다 ‘할 수 있을까’를 ‘할 수 있다’로 변화시킨 겁니다. 야구는 정말 멘털 게임이더라고요.”
―올 시즌 구자욱 선수가 이룬 여러 지표들이 그동안의 노력을 대변해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많은 경기에 출전했다는 점(139경기), 두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세 번째는 팀이 정규시즌 2위 성적으로 플레이오프를 치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부분을 꼽고 싶어요.”
―팀 성적이 좋으면 야구 하는 재미가 배가 되죠?
“그렇죠. 우리 팀이 너무 오랫동안 어두운 순위에 머물렀잖아요. 너무 긴 터널을 지나다보니 우울한 마음이 들었는데 올 시즌 아쉽게 정규시즌 우승은 놓쳤지만 모두 한 마음으로 팀을 다시 상위권에 올려놓은 선수들과 감독님 코칭스태프, 그리고 변함없이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해준 팬들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을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팬들의 많은 사랑과 관심이 성적이 좋을 때는 감사함으로 다가오지만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돌이켜보면 그 터널을 지나는 동안 팀 중심 타선에 제가 있었거든요.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는데 그걸 받아줄 선배님들이 안 계시면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제 자신을 자책하며 그 터널을 지나왔는데 올 시즌 성적으로 그 모든 고난들을 한 번에 보상 받은 듯했어요. 뭔가 엄청 뿌듯하면서도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드는 등 여러 감정이 교차하더라고요. 올 시즌은 제 가슴을 울리는 한 해였습니다.”
―팀을 이끈 선배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은퇴하면서 구자욱 선수가 갖는 외로움도 컸을 텐데요.
“대신 그 선배님들의 빈자리를 다른 좋은 선배님들이 채워주셨어요. 선배님들 통해 배운 것도 많았고요. 모든 선수들이 1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아 그 노력들을 인정받지 못할 때 무척 속상했습니다.”
―삼성왕조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나요?
“부담보다 다시 찾고 싶었죠. 선배님들이 이룬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어요. 주위에선 구자욱이 삼성 들어온 후 팀 성적이 떨어졌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제 자신한테 물었습니다. ‘내가 잘못 굴러 들어온 돌이니?’하고요.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올 시즌 팀 성적을 향한 구자욱의 감정선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비록 팀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지만 그는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치열하게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고, 이번에 더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건 내년에 더 달려야 할 명분을 만들어줬다고 해석했다.
―프로 입단 전에도 야구에 대해 그토록 절절한 마음이었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게 아니고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야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터라 꼭 성공해서 부모님을 잘 모시고 싶었어요. 어느 날 야구가 놀이가 아닌 전쟁이 된 순간부터 좌절과 방황을 많이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저를 잡아주셨거든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아버지 말씀으로 인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2018시즌 마치고 2019시즌 앞둔 상황에서 벌크업을 시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9년 거둔 성적이 처음으로 3할에 못 미치는 2할 6푼 7리였어요.
“팀에서 제게 원하는 방향이 장타였어요. 라이온즈파크가 타자친화적인 구장이라 장타가 필요했는데 우리 팀에서 홈런 20개 이상 칠 수 있는 선수가 외국인선수 외엔 없었거든요. 벌크업을 통해 근육량을 늘리면 스윙에 힘이 붙어 장타를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3개월가량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먹고 운동하는 일들을 반복했습니다. 토하면서도 먹는 건 멈추지 않았어요. 하루는 갑자기 간 수치가 상승된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80kg의 체중을 93kg까지 늘리고 운동했는데 가장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거예요.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면서 순간 제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했어요. 다음 시즌을 이어갈 자신이 없더라고요. 체중 증가 후 비거리는 늘었지만 홈런은 2018시즌에 비해 5개나 감소했었죠.”
―그러다 올 시즌에는 커리어 최고인 홈런 22개를 달성했습니다. 그 배경이 궁금하네요.
“홈런과 장타는 체중과 관계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거죠. 타석에 들어서면 투수와 싸워야 하는데 이전의 전 외적인 요인에 더 신경을 쓴 편이었어요. 올 시즌에는 타석에서 투수한테만 집중했습니다. 투수와 기 싸움도 하고, 투수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 고민도 하는 등 최대한 투수한테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투수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어려운 공 하나를 잘 참아내면 그런 부분들이 쌓여 3할 타율 유무를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구자욱은 올 시즌을 앞두고 타격폼 전체를 수정했다고 말한다. 우연히 SNS를 통해 접한 야구 동영상을 보고 수소문 끝에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 중인 김동욱(개명 전 김동명, 삼성-KT 출신) 코치를 만나게 됐고, 김 코치를 통해 비시즌 동안 타격폼을 수정하다 스프링캠프에서 김용달 코치와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친 후 이영수 코치가 점을 찍어줬다고 말한다.
“차에 방망이를 싣고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스윙하며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올 시즌 배럴 타구가 많이 나온 건 단순하면서 일정한 타격폼을 유지한 덕분입니다. 그런 타격폼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움 주신 코치님들한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구자욱은 평소 방망이와 자주 대화하는 편이다. 잘 안 맞을 때는 어디 구멍이 난 거냐고, 정신 좀 차리라고 화를 내면서도 매번 잘 맞게 해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정성껏 방망이를 닦는다.
올시즌 생애 첫 골든글러브 수상을 노리는 구자욱. 외야수 부문에선 3명의 수상자가 나오는데 후보 선수가 21명이다. 2021시즌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은 12월 10일 열린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