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색깔’ 없는 감독, 상황에 맞는 야구 해야…히어로즈·두산 경험이 감독 생활에 큰 도움”
선수 이강철은 1989년 프로 데뷔 후 해태에서만 5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했지만 늘 그 앞에는 동시대의 명투수인 선동열이 존재하면서 ‘2인자’에 머물렀다. 역대 다승 3위이자 사이드암 최다승 기록인 통산 152승을 거두고 2005년 마운드를 내려온 그는 2006년 KIA 타이거즈 2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3~2016년 넥센(키움) 히어로즈 1군 수석코치, 2018년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를 지내고 2019년 KT 위즈 사령탑에 올랐다.
이 감독은 감독 데뷔 후 종종 선수 시절은 ‘2인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선 1위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고, 3년 만에 그 말을 실현해냈다. 12월 7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이강철 감독을 만났다.
“나도 꼭 감독하고 싶다.”
2016년 11월이었다. 당시 이강철 수석코치는 넥센 히어로즈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염경엽 감독이 팀을 떠나고 장정석 감독이 새로운 사령탑에 오르면서 코칭스태프가 개편됐고, 수석코치 이강철은 자연스럽게 팀을 떠나야만 했다. 그때 이 수석코치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이 얘긴 꼭 써 달라. 언젠가 한번쯤은 감독을 해보고 싶다고. 그동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자료들과 경험들을 감독을 하며 펼쳐 보이고 싶다. 여기서 그냥 물러나면 참 아까울 것 같다.”
감독을 하고 싶었던 이강철 감독은 이후 두산 베어스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2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가 총괄로 자리를 옮겼고 한 달 만인 2017년 4월 2군 감독직에 오른다. 이 감독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2군 감독이었지만 팀 운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히어로즈에선 4년 동안 수석 코치만 맡다 처음으로 2군 감독에 오른 거라 그동안 쌓아온 경험들을 펼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두산 김태룡 단장님과 김태형 감독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감독은 한 시즌 동안 2군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한다. “다시 1군 지도자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만 있다면 2군 감독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당시 내 나이가 52세였는데 50대 중반 전까지 1군 감독 기회가 없다면 앞으로 감독을 맡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2군 감독이란 자리도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지만 그 자리에 안주하기 싫었다. 어쩌면 좀 더 높은 곳을 보고 때를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감독은 2018년 한화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한용덕 전 감독을 대신해 1군 수석코치를 맡게 되면서 다시 수석코치의 삶을 살았다. 2군 감독은 자신이 선택과 결정하는 위치였지만 1군 수석코치는 감독의 지시사항을 코치와 선수들에게 잘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2007년부터 KIA에서 코치 생활하면서 코치란 자리는 생계형이란 걸 느꼈다. 내 야구철학과 신념보다는 감독한테 맞추면서 보좌하는 역할이란 걸 절감한 것이다. 안 잘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염경엽 감독님의 제안을 받고 2013년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길 때 솔직히 떨리더라. 왜냐하면 계속 KIA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해서든 중간에 경질되진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지만 새로운 팀에선 결과에 따라 내 자리가 보장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KIA를 나와 히어로즈와 두산을 경험했던 게 지금 감독 생활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타이거즈의 울타리를 벗어나 절실한 마음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이 감독은 KT 감독 인터뷰를 제외하고 지도자 생활하면서 두 차례의 감독 면접을 봤는데 세 번째 인터뷰인 KT 감독 면접 당시에는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약간 내정돼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인터뷰 내용이 이전과 차이가 있었다. 내심 ‘이러다 진짜 감독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감독으로 확정됐을 당시 두산이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있는 중요한 상황이었음에도 김태룡 단장님과 김태형 감독님의 배려 덕분에 일찍 발표가 났다. 두산에서 우승을 이루고 나왔다면 홀가분했을 텐데 준우승으로 한국시리즈를 마무리해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이 뒤섞였다.”
감독 면접 때 나올 수 있는 예상 질문 중 첫 번째는 ‘지도자 색깔’이다. 이 감독은 자신의 야구 색깔을 묻는 질문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 상황에 맞는 야구를 펼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번트를 대야 하면 번트를 대고, 작전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면 작전대로 움직이면서 이기는 데 집중한다. 그동안 여러 감독님들을 모시면서 자신의 색깔대로 야구하려다 실패한 분들을 봤다. 나는 내 색깔을 없애고 팀 환경에 맞는 야구를 펼치고 싶었다.”
팀 창단 후 1군에 합류한 지 5년차 되는 팀을, 3년 연속 꼴찌를 하다 겨우 9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팀을 상대로 이 감독은 첫 해 주전 선수를 정하고 투수 분업화, 포지션 배분에 중점을 뒀다. 덕분에 KT 창단 후 첫 국내 10승 투수인 배제성이 탄생했고, 그 해 팀은 6위에 오르며 마지막까지 NC와 와일드카드 경쟁을 벌이는 등 환골탈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9위를 했던 팀이라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았다. 하지만 시즌 치르면서 승패 마진이 마이너스 15까지 떨어질 때는 힘들더라.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성적을 내고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타선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 감독은 그때 다시 생각을 바꿨다. 올해는 팀을 재정비하는 시기로 삼고 다음 시즌부터 승부를 내는 팀으로 바꾸자고 말이다.
“2019년에는 미디어에서 ‘KT는 실험만 한다’며 쓴소리를 많이 했다. 솔직히 쑥스러웠지만 투수코치, 수석코치, 2군 감독을 하며 쌓은 ‘눈’을 믿고 싶었다. 가능성 있는 선수 유무, 기회를 줘야 하는 선수의 유무, 불펜 자리 정비, 선발 투수 고정 등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코칭스태프, 전력분석팀과의 협의 끝에 이길 수 있는 팀으로 가는 방법을 찾았다.”
2020시즌 KT는 단단한 팀으로 성장해갔다. 선수들마다 자리가 정해지면서 책임감을 갖게 됐고 투수 분업화가 안정기에 도달하며 정규시즌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선수들이 현실을 깨닫는 게 중요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어떤 순번으로 프로 유니폼을 입은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선수의 자리는 내가 정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 선수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걸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2019년 후반기 승패 마진 마이너스 15를 역전해 5할 승부를 이뤘고, 지난해 정규시즌 2위, 그리고 올해 통합 우승을 이룬 계기가 됐다고 본다.”
이 감독은 팀을 맡은 지 3년 만에 통합 우승을 이룬 소감으로 “내 야구 인생은 계단식인데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탄 것 같아 걱정”이라고 자세를 낮춘다.
“감독이 선수를 믿는다는 게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기는 팀이 되려면 그 어려운 걸 해결해야 한다. 선발 투수가 볼넷 한두 개 내줬다고 교체하고, 타자가 삼진 먹고 수비에서 실책했다고 빼버리면 선수들은 실수하는 걸 두려워한다. 실수해도 지켜봐주고 그걸 이겨내기를 바라는 기다림이 필요했다. 주위에선 언제까지 믿음의 야구를 하느냐고 아우성이었지만 KT였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투수와 타자가 있어도 넣었다 뺐다 하는 출전 기회 속에선 성장하지도 못할뿐더러 원하는 성적을 내기 어렵다. 프로 선수들은 자리잡기까지가 힘들지 그 자리에 올라서면 부상 제외하곤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낸다.”
기회를 줬고, 충분히 기다렸음에도 선수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이 감독은 과감히 교체 카드를 빼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다”는 말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팀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2020시즌 KT는 정규시즌 2위에 오르며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상대한다. 그러나 결과는 1승 3패. 이 감독은 자신이 먼저 2위란 성적에 안주했다며 고개를 숙인다.
“내가 정규시즌 2위 성적에 안주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우리 잘한 거라고 셀프 칭찬하면서 플레이오프를 독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반면에 두산 김태형 감독님은 우리를 상대로 독하게 밀어붙였다. 완패였다. 그때의 경험이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상대했을 때 큰 도움이 됐다. 1, 2차전을 잡지 못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최대한 선취점을 빼앗고 분위기를 갖고 오는 데 집중했다.”
2021시즌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맞붙은 두산과 KT. 준플레이오프전부터 ‘도장깨기’ 식으로 승리를 거두고 올라온 두산을 상대하는 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두산이라서 더 의미가 있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선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1, 2차전을 먼저 내주면 이후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 2차전 승리가 절실했다. 1차전부터 독하게 상대했다. 번트에 약한 호잉에게 희생 번트를 지시했고, 7회 1사 1·3루 상황에서 황재균 타석 때의 히트 앤드 런(타자는 치고 주자는 달리는 작전)이 적중했다. 2차전에선 박경수가 공수에서 맹활약한 덕분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시리즈를 4연승으로 끝낼 수 있었던 건 1, 2차전 승리가 크게 작용했다.”
이 감독은 두산과의 한국시리즈를 이렇게 정리한다.
“두산이라 좋았고, 두산이라 힘들었다. 리그 최강 팀과 우승을 다퉜다는 게 행복했고 영광스러웠다. 이런 팀을 상대로 우승했기 때문에 더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산 베어스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팀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감독,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선수단 전체가 더그아웃 앞에 도열해 KT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했다.
“경기 후 김태형 감독과 포옹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감독에게 감독은 어떤 자리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음 속 이야기를 전한다.
“매일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게 정말 힘들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아주 멋진 자리이고, 성적이 안 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다. 올 시즌은 멋진 자리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