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홍수 속 번역가 귀하신 몸? 임금 월 100만 원대 다수…하청에 재하청 “실력보단 속력 원해”
프리랜서 번역가 A 씨는 최근 ‘OTT 홍수 속 번역 시장도 호황’이라는 기사를 읽고 배를 잡고 웃었다. ‘콘텐츠 시대 유망직업’으로 번역가가 언급된 기사를 동료들에게 보여주자 다들 “‘유망’까지만 맞다”며 손을 내저었다. 번역가라는 직업이 별로라서가 아니라 ‘먹고 사는 일’로는 후배들에게 추천하기 미안해서다.
모두의 기대 속에 상륙한 디즈니+에게 의외의 복병은 자막이었다. 디즈니+는 국내 출시 3일 만에 오역 논란에 시달렸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의 한 장면에서 “함께 성에 가지 않을래요?(You're welcome to join us in the castle if you'd like)”라는 올라프의 대사가 “가랑이를 함께해요?”라고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는 ‘역대 최고 선수’를 뜻하는 ‘G.O.A.T(Greatest Of All Time)’가 문자 그대로 ‘염소(Goat)’로 번역됐다.
위 사례들이 황당한 번역이었다면 번역가의 실력이 부족한 사례도 발견됐다. 마블 시리즈 중 하나인 ‘호크아이’에서는 “제 활에 사인해 주실래요?(Can you sign my bow?)”가 “제 화살에 사인해 주실래요?”로, “은신처로 가는 거죠?(We're going to your safe house?)”는 “당신의 안전한 집으로 가는 거죠?”로 오역됐다. 전문가 실력이라고 보기에는 엉성한 수준의 번역이었다.
오역으로 인한 불만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디즈니+ 측은 언론을 통해 “관련 내용을 인지하고 있고 내부 확인 중인 상황”이라며 “소비자에게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번역 업체나 오역이 발생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소상히 해명하지 않았다.
오역을 낳는 건 문화 콘텐츠를 파는 기업의 구태 사업구조와 열악한 임금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등 글로벌 OTT 업체와 직접 거래를 하는 번역가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프리랜서 번역가들은 에이전시를 통해 일을 받는다. 문제는 일을 받은 에이전시에서 번역가를 모집해 재하청하는 과정을 거치며 번역료를 과도하게 낮추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시세보다 훨씬 낮은 단가를 제시하고 작품을 대량으로 가져오는 것도 문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예 임금이 낮은 외국인을 한국어 번역에 투입하려 한 시도도 있었다. 한 제보자는 “한 해외 법인의 번역 회사에서 ‘그냥 한국어 할 줄 아는 아무나 지원 가능’이라는 구인 공고를 내고 번역가를 뽑은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플랫폼의 콘텐츠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을 데리고 한국어 시험도 치렀는데, ‘빈 칸에 들어갈 가장 알맞은 단어 고르기’ ‘맞는 한글 문장 고르기’ 등 유치원 수준의 문제가 나왔다. 당연히 중간 결과는 좋지 않았고 고객사의 퇴짜를 맞았다. 결국 프로젝트를 중지하고 여러 차례 시험을 거쳐 번역가를 걸러 내야 했다. 마지막엔 한국인만 남더라”고 말했다.
번역가들은 우스갯소리로 스스로를 ‘날품팔이’라고 칭했다. 번역 업계에선 요율로 임금을 계산하는데 표준이 없어 혼잡하다. 작품을 기준으로 하기도 하고 1분, 10분 등 시간이나 단어를 기준으로 계산을 하는 곳도 있다. 어떤 업체를 만나 어떻게 계약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계약서 작성 여부도 순전히 운에 맡긴다. 프리랜서의 숙명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센터에서 한영 번역의 경우 1자당 최저 160원 등 기준요율을 정해두긴 했으나 통용되지는 않는다. 영상 번역의 경우 통상적으로 10분에 1만 5000~2만 5000원을 받는다. 초보와 베테랑의 임금 격차도 그리 크지 않다. 최저임금은커녕 월 100만 원 수준을 버는 이들이 업계 다수를 차지한다.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것도 번역료 절감에 한몫을 차지했다. 기초 학력 수준이 높아지면서 ‘나도 영어를 좀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너도나도 취미 삼아 번역 시장에 뛰어든다. 3만 원, 5만 원… 용돈벌이에 괜찮다고 생각하면 단가가 더 낮아져도 상관없다. 업체도 이들을 거르지 않고 채용한다. 이후 취미 삼아 번역을 하던 이들은 업계를 떠나고, 남은 건 낮아진 요율이라는 것이 전업 번역가들의 설명이다.
한편, 번역을 하고도 참여한 작품을 밝힐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번역가는 통상적으로 프로젝트 참여 전, 정보 보안을 위해 해당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작품과 관련된 내용을 발설하지 않도록 한다는 NDA(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한다. 그런데 일부 업체에서는 단순히 줄거리가 아니라 해당 작품 참여 사실조차 언급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프리랜서 번역가 B 씨는 “(에이전시에서) 작품 릴리스(출시) 여부와는 무관하게 작품명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번역가가 되려고 했는데 홍길동이 됐다. 참여한 작품을 이력서나 포트폴리오에 쓰지 못 한다면 커리어를 쌓을 수 없기에 ‘아무개 회사의 드라마 참여’ 정도로 드러내고 있다. 아예 번역가 이름을 노출해주지 않는 곳도 있었는데 존재가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땐 협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주는 성우들이 부럽다”고 하소연했다.
한국성우협회는 최근 넷플릭스의 갑질 의혹과 관련 입장문을 “넷플릭스가 에이전트 겸 벤더사인 아이유노를 통해 작품에서 어떤 배역을 연기했는지 등을 어디에도 코멘트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성우들에게 전달했다”며 “이는 불공정 갑질의 행태”라고 비판한 바 있다.
최근 한 대형 번역 업체 대표가 언론 인터뷰에서 “국내 번역 인력은 우수하면서 신속하다. 에피소드 한 편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빠르면 2시간, 통상 6시간 이내에 끝낸다”고 한 칭찬의 이면에는 슬픈 현실이 있다. 이 말을 번역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해외 드라마 한 편을 2시간 안에 번역을 해야 능력 있는 번역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번역가 A 씨는 “에이전시에선 번역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빨리 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러니까 실력보단 속력이다. 최대한 빨리 마감을 해서 PM(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잘 보여야 다음에도 또 불러준다. 우리도 수입 면에서도 안정적으로 생계를 이어가려면 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을 번역해야 한다. ‘이 표현이 맞을까? 더 좋은 표현은 없을까?’ 하고 관련 책을 뒤적거리던 시절이 꿈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일에 애정이 있는 분들도 부업에 부업을 거듭하다 결국 다른 직업을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 품질을 높이려면 실력 있는 번역가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이에 상응하는 번역료를 지불해야 한다. 오역으로 인한 품질 저하는 결국 매달 구독비를 내고 있는 소비자에게 돌아가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