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상 재직, 기술 전문가로 조선에 IT 접목…대규모 수주 통해 2023년 실적 상승 기반 마련
일요신문이 창간한 1992년 당시 번듯한 대기업이었지만 현재 이름은 물론 존재조차 희미해진 기업이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큰 파고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공중에서 해체돼도 특별한 일이 아니던 시절, 그곳에 묵묵하게 생업을 이어가던 임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오너를 맞아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거나 구조조정 등으로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 임직원에서 하루 아침에 절벽 위에 선 셈이다. 불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능력을 인정 받아 최고경영자(CEO)까지 오른 이들이 있다.[일요신문] 이성근 대우조선해양(대우조선) 대표이사 사장은 40년 이상을 한 회사에서만 근무했다. 이성근 사장은 그 능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사장까지 승진했지만 평탄한 회사 생활을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사장이 재직하는 동안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조선도 워크아웃을 겪었고, 워크아웃 졸업 후에도 채권단의 관리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2010년대 들어서는 세계적인 조선업계 불황으로 인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도 진행됐다.
1957년생인 이성근 사장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를 졸업한 후 대우조선공업에 입사했다. 대우조선공업은 1994년 대우중공업에 흡수합병됐다가 2000년 다시 대우조선공업으로 분할됐다. IMF 외환위기로 대우그룹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대우중공업이 대우종합기계(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와 대우조선공업으로 분리된 것. 대우조선공업은 2002년 사명을 현재의 대우조선해양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대우종합기계가 2005년 두산그룹에 매각된 것과 달리 대우조선공업은 아직도 채권단 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성근 사장은 회사가 채권단에 넘어간 후에도 자리를 지켰다. 이 사장은 2006년 대우조선 선박해양기술연구소장 상무로 승진하면서 임원 반열에 올랐다. 그는 2009년 전무로 승진해 대우조선 미래연구소장을 맡았고, 이어 2011년 1월 중앙연구소장, 2012년 6월 설계부문장, 2013년 12월 기술총괄, 2015년 4월 전략기획실장 등을 거쳤다. 이 사장은 2015년 9월 부사장으로 승진해 조선소장을 맡았고, 2016년 12월 선박사업본부장, 2017년 7월 조선소장을 역임하는 등 여러 부서를 거쳤다.
이처럼 이성근 사장은 2010년대 들어 대우조선의 핵심 임원 반열에 올라섰지만 당시 회사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조선업계가 불황에 빠지면서 대우조선 실적이 급격히 하락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노사 갈등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2014년 대우조선의 분식회계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외적인 이미지도 추락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19년 초 대우조선 인수 계획을 밝혔다. 정성립 전 대우조선 사장은 2019년 2월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 계획 발표 직후 사의를 표명했다. 정 전 사장의 임기는 2021년 5월까지였지만 대우조선 민영화가 이뤄지면서 본인의 소임을 다했다는 판단 하에 물러난 것으로 전해진다.
정성립 전 사장이 물러나면서 이성근 당시 부사장이 대우조선 후임 사장으로 선임됐다. 민영화 추진의 바통을 이어받은 셈이다. 대우조선 측은 당시 이성근 사장에 대해 “생산·기술 분야 전문가로 현재 대우조선의 기술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이성근 사장은 기술에 대한 지식도 높지만 평소 IT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언뜻 보면 조선과 IT는 다른 분야 같지만 대우조선에서는 최근 몇 년간 두 산업을 접목해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성근 사장은 취임사에서 “CEO 임무를 시작하면서 초일류 기술로 시장의 판을 바꿔나가고, 이를 통해 지속 발전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기치를 내걸고자 한다”며 “기술 대우라는 이전 명성을 되살리고, 추격을 허용하지 않는 기술적 격차와 리더십을 갖춘 ‘기술 DSME’를 반드시 만들어 내겠다”고 기술력을 강조했다.
이 때문인지 대우조선은 최근 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대우조선은 2020년 6월 원격유지보수 지원시스템 ‘DS4 AR Support’를 자체 개발했다고 밝혔고, 같은 해 7월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항과 스마트 기술 관련 협력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10월에는 ‘인공지능(AI) 열간가공 로봇’을 개발해 세계 최초로 열간가공 작업에 AI 기술을 접목한 로봇 시스템을 적용했다.
당초 이성근 사장은 기술 전문가로 재무나 영업 부분에 취약할 것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이 사장은 2021년 초 전 임원의 급여를 최대 50% 반납하기로 하는 등 원가절감에 나서는 등 재무 관리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우조선 임원은 2015년부터 약 20%의 임금을 반납해 왔지만 2021년부터 해당 규모를 확대한 것. 지금은 사라진 대우그룹의 사훈은 △창조 △도전 △희생이었다. 이성근 사장은 IT와 조선이 결합한 스마트 선박을 선보이면서 창조정신을 보였고, 임금을 반납하는 희생정신까지 발휘하는 등 ‘대우맨’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성근 사장은 예상외로 대규모 수주를 이끌며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우조선은 2021년 컨테이너선 20척,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15척 등 총 107억 7000만 달러(약 12조 9000억 원) 규모의 선박 60척을 수주했다. 이는 2022년 수주 목표치인 77억 달러(약 9조 2000억 원)를 초과 달성한 수준이다.
이성근 사장이 대규모 수주에 성공함에 따라 2023년께 실적 상승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비록 최근 실적은 하락세지만 장기적 관점에서의 성장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 김용민 케이프투자증권 연구원은 대우조선에 대해 “2022년부터 본격적인 건조에 들어가 점진적으로 회복해 적자폭 축소를 기대한다”며 “2023년 고가수주 물량을 소화하면서 흑자 전환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이성근 사장의 숙제는 내부 분위기 안정화다. 대우조선 내부에서는 구조조정을 우려하며 피인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대우조선지회(대우조선 노조) 측은 “대우조선 매각의 수혜는 전부 현대중공업 총수 일가에게 돌아가는 반면 피해는 대우조선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수백 개의 기자재 업체와 조선 노동자에게 발생한다”며 “수많은 노동자와 지역경제, 혈세를 쏟아 부은 국민 모두에게 피해가 온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성근 사장은 2019년 10월 사내 소식지 인터뷰에서 “(대우조선이 매각되면) 유상증자를 통해 1조 5000억 원의 신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어 경영이나 재무적 측면에서 안정적인 구조로 갈 수 있다”고 밝히며 노조 설득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조선 노조는 여전히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성근 사장의 임기는 오는 3월까지지만 기술 발전과 대규모 수주 덕에 연임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당장의 실적은 하락세에 있어 연임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대우조선의 매출은 2018년 9조 6444억 원, 2019년 8조 3587억 원, 2020년 7조 302억 원, 2021년 1~3분기 3조 1309억 원으로 매년 감소세에 있다. 영업이익 역시 2019년 2928억 원에서 2020년 1534억 원으로 줄었고, 2020년 1~3분기에는 1조 2393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021년 대규모 적자는 후판 등 원자재 가격 인상 전망에 따라 공사손실충당금을 선반영한 영향이 크다.
다른 변수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 인수 성공 여부다. 오는 3월까지 인수가 완료되면 현대중공업그룹이 대우조선 사장 임명권을 갖고, 그렇지 않으면 KDB산업은행이 사장 임명권을 유지하게 된다. 유럽연합(EU)의 현대중공업-대우조선 기업결합 심사가 늦어지면서 인수가 무산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