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방울로 250개 질병 진단’ 기술 개발 승승장구…직원 내부고발로 허구 드러나 기업가치 ‘11조원→0원’
한때 미국 실리콘밸리 바이오 업계의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홈즈(37)가 최근 캘리포니아주 법원에서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4년 홈즈는 손가락 끝에서 채취한 혈액 한 방울로 250여 개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면서 업계의 스타로 떠올랐었다. 당시 이 기술은 미국의 유명 정치인들과 투자가들이 앞다퉈 투자할 만큼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저렴하고 간단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의학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게임 체인저인 줄만 알았던 이 기술이 모두 허구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서 홈즈는 하루아침에 사기꾼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환자들은 오진을 받았고, 투자자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왜 사람들은 홈즈에게 속았던 걸까.
“아주 작은 바늘 하나로 혈액 한 방울을 채취한 다음 바이오칩에 넣으면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기존의 다른 혈액 진단 장비들보다 99.9% 적은 양의 혈액을 사용하고, 즉석에서 성병에서부터 암의 초기 징후까지 모든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절반의 비용을 들여 빠르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생명을 구할 것이다.”
꿈의 기술로 불렸던 ‘에디슨’ 혈액 진단 장비에 대해 홈즈는 이렇게 설명했다. 19세 때 스탠퍼드대학을 중퇴하고 바이오 스타트업인 ‘테라노스’를 창업한 홈즈는 11년 동안 연구에 매진한 끝에 2014년, ‘에디슨’이라는 자신의 성과물을 세상에 공개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금발의 여성이 간편하고 저렴한 혁신적인 기술을 내놓자 바이오 업계는 환호했으며, ‘테라노스’ 기업의 가치는 날로 치솟았다. 게다가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 잡스’ 스타일은 투자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홈즈가 투자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자 앞다퉈 줄을 대기 시작하는 큰손들도 많았다. ‘테라노스’의 첫 번째 주요 투자자는 실리콘밸리의 벤처 투자가이자 홈즈의 어릴 적 친구인 제시 드레이퍼의 아버지 팀 드레이퍼였다. 이외에도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을 비롯해 월마트 상속녀인 앨리스 월튼, 억만장자 사업가인 드보스 가문, 멕시코 통신 재벌인 카를로스 슬림 등도 투자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와 관련, 1억 달러(약 1200억 원)를 투자했던 드보스 가문의 재정 담당자였던 리사 피터슨은 “홈즈는 자신의 회사에 투자하도록 대여섯 곳의 부자 가문에 직접 연락을 취했다”면서 “당시 드보스 가문에 홈즈는 2015년 한 해에만 자신의 회사가 10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홍보했었다”고 증언했다.
실제 이보다 앞선 2013년 슈퍼마켓 체인 ‘월그린스’는 ‘테라노스’가 미 전역에 클리닉을 설립할 수 있도록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기도 했다. 누구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시로 혈액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거물들로부터 홈즈가 투자 받은 금액은 9억 4500만 달러(약 1조 1300억 원)에 달했다. 덕분에 한때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는 90억 달러(약 11조 원)까지 치솟았고, 홈즈 개인의 순자산은 45억 달러(약 5조 원)로 늘어났다.
이사진의 면면도 화려했다. 홈즈는 ‘테라노스’의 초기 후원자로 울트라 리치(거물급 부자)들을 모집하는 데 집중했다. 첫 이사진 가운데 한 명은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었다. 홈즈와 두 시간 면담을 한 후 슐츠 전 장관은 즉시 ‘테라노스’ 이사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고, 뒤이어 그의 인맥을 동원해 12명으로 구성된 이사진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부 장관, 게리 루그헤드 전 해군 제독, 빌 프리스트 전 상원의원, 샘 넌 전 상원의원, ‘웰스파고’의 전 CEO(최고경영자)인 딕 코바체비치, ‘벡텔’의 라일리 벡텔 전 CEO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밖에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등도 홈즈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2015년 클린턴 전 대통령은 컨퍼런스에서 홈즈를 소개하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미래는 안전한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치켜세웠는가 하면, 바이든 대통령은 ‘테라노스’ 본사를 직접 방문해 홈즈를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호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직원의 고발로 ‘테라노스’의 허구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4년 ‘테라노스’에 입사한 타일러 슐츠는 회사에서 어딘가 미심쩍은 점을 발견했다. 그가 판단하기에 회사가 실시했던 검사는 모두 사기에 가까웠다. 일례로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에서 실시된 약 100만 건의 검사는 모두 무효 처리되거나 수정이 필요해 보였다.
2015년 슐츠는 이 사실을 ‘월스트리트저널’의 존 캐리루 기자에게 제보했다. 캐리루의 끈질긴 취재 끝에 ‘테라노스’의 거짓말이 속속 탄로나기 시작했다. 실리콘밸리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보도한 캐리루는 “회사 내부적으로 실시하는 검사는 매우 부정확하고, 사실은 신기술이 아닌 옛날 방식으로 혈액 검사를 하고 있었으며, 외부 연구소에서 검사를 실시하고 있었다”라고 폭로했다.
요컨대 고객에게 제공한 200개 넘는 검사 결과의 대부분은 ‘테라노스’가 개발한 ‘에디슨’ 장비가 아닌 기존에 있던 다른 회사의 혈액 검사 장비로 측정한 것이었다. 또한 ‘에디슨’ 장비로 실시한 검사 결과가 타사의 장비에 비해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캐리루는 2018년, 자신이 취재한 이런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배드 블러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모든 게 허구로 드러나자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미 보건당국은 ‘테라노스’의 혈액진단 방법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하고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으며, 홈즈는 CEO 직에서 쫓겨난 후 대규모 사기 혐의로 기소됐다. 연구소와 검사 센터는 모두 폐쇄됐고 ‘테라노스’가 2년여 간 진행한 연구는 모두 무효 처분됐다. 사정이 이러니 2015년 한때 90억 달러(약 11조 원)까지 치솟았던 기업 가치는 ‘0’으로 추락한 후 청산 절차를 밟게 됐으며, 투자자들은 돈을 거의 다 날리고 말았다.
2018년 3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홈즈와 그의 파트너였던 써니 발와니 전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결국 11건의 사기 혐의로 기소됐던 홈즈는 지난 1월 3일(현지시각) 사기 및 공모 혐의 가운데 4건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그리고 다른 3건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1건은 재판 초기 기각됐으며, 나머지 3건은 배심원단이 도저히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으는 게 불가능하다면서 평결을 내리지 못했다. 유죄가 모두 인정될 경우 홈즈는 각 혐의당 최대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전망이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홈즈는 즉각 항소할 뜻을 비쳤다. 법정에서 홈즈는 전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스무 살 연상인 발와니로부터 그동안 정신적, 심리적,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결코 고의로 사기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홈즈는 “발와니는 10년 이상 지속된 연애 기간 동안 나를 심하게 통제했다. 때로는 나를 강하게 비난하고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호소했다. 심지어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시간을 보냈는지, 심지어 무엇을 먹는지도 통제했다고도 주장했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홈즈가 항소할 경우 다시 시작될 법정 다툼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한편 ‘테라노스’의 몰락은 그동안 베스트셀러, 다큐멘터리, 팟캐스트의 소재로 사용됐으며, 조만간 제니퍼 로렌스가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홈즈는 에반스 호텔의 후계자이자 10세 연하인 윌리엄 빌리 에반스와 결혼한 상태로, 2021년 7월 아들을 출산했다.
잡스 카피캣에 홀딱! 홈즈의 무엇이 사람들을 홀렸나
승승장구하던 시절 홈즈는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 가운데 110위에 이름을 올리면서 전세계 억만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 또한 ‘타임’이 선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는가 하면, 한때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자수성가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투자자들로 하여금 홈즈에게 빠져들게 한 걸까. 사실 돌이켜 보면 당시 사람들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 즉, 홈즈라는 젊은 여성에 매료돼 있었다. ‘테라노스’의 기술력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사람은 없었고, 단지 이를 홍보하는 홈즈에게만 모두들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홈즈가 단 한 편의 관련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이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장에서는 계속해서 “테라노스가 너무 베일에 싸여 있다” “주요 연구진이 계속 이탈한다”는 의혹이 떠돌았지만 여기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해외 언론들은 홈즈의 전략적인 이미지 메이킹이 한몫했다고 분석한다. 가령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등 여느 천재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처럼 명문대를 중퇴했다는 점, 미모의 금발(사실은 갈색 머리를 염색함) 여성 CEO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잡스를 떠올리게 하는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를 즐겨 입는다는 점 등이 그랬다.
이런 스타일에 대해 홈즈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검은색 터틀넥을 입혔다. 사실 옷을 고르는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이런 차림을 즐겨 입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테라노스’의 전 직원인 아나 아리올라는 “사실은 홈즈가 잡스처럼 성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잡스의 스타일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과거 애플에서 일했던 아리올라는 “홈즈가 나에게 잡스의 옷 입는 스타일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잡스가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터틀넥을 입는다고 알려주자 그후 홈즈는 갑자기 스타일을 바꾸고 나타났다. 검은색 터틀넥과 검은 바지를 입고, 입술에는 빨간색 립스틱을 발랐다. 머리는 곧게 펴서 뒤로 묶어 올리는 스타일로 바꿨다”고 말했다.
심지어 홈즈는 잡스의 식단이나 생활 방식까지 따라했으며, 홈즈가 작성한 메모장에는 ‘스티브 잡스처럼 되기(Becoming Steve Jobs)’라는 글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스타일 변신은 성공했다. 홈즈는 곧 ‘여자 잡스’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포춘’ ‘포브스’ ‘뉴욕타임스’ ‘글래머’를 포함한 유명 잡지 표지에 올 블랙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이밖에도 아리올라는 저음이 특징인 홈즈의 목소리 또한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홈즈는 대부분의 공식석상에서 저음의 바리톤 목소리로 말하곤 했는데 이 모든 게 사실은 가짜였다는 것이다.
‘테라노스’의 전 직원들 역시 “사실 홈즈의 목소리는 여느 여성들과 다를 바 없는 톤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어떤 전 직원은 “처음 입사했을 때 홈즈가 환영 인사를 했는데 그때 홈즈는 또래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목소리를 냈었다”고 회상했는가 하면, ‘테라노스’의 몇몇 내부 관계자들은 인터뷰에서 “홈즈는 술을 몇 잔 마시면 가끔 더 높은 톤으로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홈즈가 이처럼 목소리를 꾸미는 이유에 대해 아리올라는 “아마도 남성 벤처 투자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나타내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홈즈의 가족은 “홈즈의 바리톤 목소리는 진짜다”라고 반박했다. 가족들은 뉴스 플랫폼 TMZ에 “홈즈의 목소리는 원래부터 저음이었다.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들 가운데 몇몇이 낮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홈즈에 대한 누리꾼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한 누리꾼은 “홈즈는 투자자들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잡스의 터틀넥도 훔쳤다. 그가 누구의 목소리를 훔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목소리 또한 분명 그의 진짜 목소리는 아닐 것”이라고 비꼬았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