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101승 찍은 뒤 후배 위해 길 터줘…이대은 수술 뒤 154km 찍었지만 “보탬 못될 것 같다” 퇴장 택해
'은퇴'라는 단어는 숨을 은(隱) 자와 물러날 퇴(退) 자를 쓴다. 화려한 무대에서 물러나 스포트라이트 뒤로 숨어야 할 시기라는 의미다. '은퇴할 때가 됐다'는 신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선수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스스로 결정했든, 구단이 권유했든, 혹은 방출을 당했든, 은퇴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한 사건이다. 선수만 힘든 것도 아니다. 그 선수의 플레이에 열광하고 박수를 보냈던 팬들도 그들을 떠나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 프로야구가 새 시즌을 기다리고 있는 2022년의 첫 달에도 야구팬에게 잘 알려진 두 명의 선수가 은퇴 소식을 전했다. 둘은 프로에서 걸어온 길도, 은퇴를 결심한 이유도 다르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2022년엔 그들을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다.
#아듀! 느림의 미학
유희관(36)은 자신을 '편견과 싸워온 투수'라고 소개했다. 장충고와 중앙대를 졸업한 뒤 2009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 그는 최고 구속이 시속 130㎞대에 머무는 투수였다. 직구 구속이 웬만한 동료 투수들의 변화구 구속과 비슷했으니 유희관이 프로에서 성공할 거라고 점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매년 "롱런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녔고, 종종 "왼손 투수의 희소성 덕에 팀에 버티고 있다"며 평가절하됐다.
유희관은 자신만의 생존법으로 프로의 견고한 편견을 깼다. 공이 느린 대신 스트라이크존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정교한 제구로 타자들의 방망이를 무력화했다. '투수는 구속보다 제구력이 중요하다'는 불변의 진리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투수였다.
입단 후 2년간 16⅔이닝을 던진 게 전부였던 유희관이 본격적으로 1군에 자리를 잡은 건 군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2013시즌이었다. 부동의 에이스였던 더스틴 니퍼트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유희관에게 선발 등판 기회가 왔다. 그해 5월 4일 LG 트윈스전에 '땜질 선발'로 나선 그는 5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두산의 왼손 투수 하면 유희관의 이름이 떠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머지 않아 그 다짐은 현실이 됐다. 유희관은 그해 데뷔 첫 10승 고지를 밟은 뒤 2020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렸다. 이강철(10년), 정민철, 장원준(이상 8년)에 이은 역대 네 번째 기록이었다. 이혜천이 남긴 베어스 프랜차이즈(전신 OB 포함) 왼손 투수 최다승(55승) 기록은 2017년에 뛰어 넘었고, 지난해 9월 19일 키움 히어로즈전에서는 KBO리그 역대 32번째이자 베어스 왼손 투수로는 최초로 통산 10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자신의 장담대로 '베어스 왼손 투수의 역사'가 된 것이다.
다만 유희관은 지난 2년간 급격히 기량이 하락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지난 시즌엔 15경기에서 4승 7패, 평균자책점 7.71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두산이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기나긴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동안에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현역 생활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장호연이 갖고 있는 베어스 최다승(109승) 기록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1월 18일 은퇴를 발표했다. 유희관은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후배들이 나와 장호연 선배의 기록을 깼으면 한다. 더 좋은 기록이 더 나와야 더 좋은 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후배들을 응원했다. 유희관의 프로 통산 성적은 281경기 101승 1세이브 4홀드 69패, 평균자책점 4.58이다.
은퇴를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연봉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두산은 지난해 연봉 3억 원을 받았던 유희관에게 올해 1억 원에 못 미치는 금액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희관은 "연봉 문제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많이 사라졌다.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강속구 투수가 점점 많아지는 현대 야구에서 유희관은 '비주류'였다. KBO리그에서 꾸준히 활약했지만 태극마크는 한 번도 달지 못했다. 유희관은 "국가대표로서 활약할 자신이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은퇴 후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희관은 은퇴 발표 이틀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은퇴사를 읽다가 끝내 울었다. 두산의 은사들과 동료들,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현역 시절 더그아웃 분위기를 띄우던 입담은 마지막 순간에도 빛났다. 기자회견 도중 음향 사고가 발생하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편견에 시달렸는데, 은퇴 기자회견 마이크까지 나에게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것 같다"고 농담해 좌중을 웃겼다.
유희관은 아직 구체적인 진로를 정하지 않았다. 야구 중계방송 3사로부터 해설위원 제의를 받았고, 방송계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두산구단도 코치직 제의를 했다. 유희관은 "감사한 일이다. 나 역시 앞으로 내 미래가 궁금하다"고 기대했다. 그리고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한결같이 응원해주신 모든 팬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라운드에서 항상 유쾌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팬들을 가장 생각했던, 두산을 사랑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바랐다.
#'이대은 특별법'의 예상 밖 결말
이대은(33)은 신일고 3학년이던 2007년 미국 메이저리그(MLB)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박찬호, 김병현, 최희섭 등 한국인 선수들이 빅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라 당시 고교야구 특급 유망주들이 유행처럼 대거 KBO리그 대신 미국 프로야구 직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유망주 대부분이 그랬듯, 이대은도 마이너리그에만 머물다 끝내 빅리그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결국 2016년 일본 프로야구(지바롯데 마린스)로 방향을 틀었고, 그해 1군에서도 거의 기회를 잡지 못하다 KBO리그 복귀를 추진했다.
KBO 야구 규약에는 고교 유망주의 무분별한 해외 리그 유출을 막기 위해 도입한 '외국진출 선수에 대한 특례' 조항이 있다. 'KBO리그 구단을 거치지 않고 외국 프로구단과 계약한 선수는 계약을 종료한 날로부터 2년간 KBO리그 소속구단과 선수계약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대은은 그 2년간 병역의무를 해결한 뒤 한국 구단의 지명을 받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KBO리그 퓨처스(2군)리그에 편입돼 있는 국군체육부대(상무)나 경찰 야구단(현재는 해체) 입단은 불가능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30세가 되는 이대은에게는 현역 복무로 인한 2년의 실전 공백이 너무 큰 불안요소였다.
이때 기적처럼 이대은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는 2015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프리미어12 대표팀에 합류해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는데, 이후 당시 국가대표 사령탑이던 김인식 감독을 중심으로 "이대은이 상무나 경찰 야구단에 입대해 2군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KBO는 2016년 10월 이사회에서 'KBO리그를 거치지 않고 해외구단과 계약한 선수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프리미어 12·올림픽·아시안게임 등 KBO가 정한 국제대회에서 국가대표로 활동한 경우, 상무나 경찰야구단에 입대해 KBO 퓨처스리그에 출장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결정했다. 이 조항에 해당되거나 앞으로 해당될 것 같은 선수는 오직 한 명뿐이었기에 사실상 2017년 3월 WBC에 이대은을 정상 컨디션으로 출전시키기 위한 포석을 마련한 셈이다. '이대은 특별법'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다. 새로운 예외 조항의 유일한 수혜자가 된 이대은은 목 뒷부분에 새겼던 짙은 문신을 피부 절제술로 제거하는 우여곡절 끝에 경찰 야구단에 추가 합격했다.
그렇게 병역의무를 마친 이대은은 2018년 8월 진행된 2019년 신인 2차드래프트 참가 자격을 얻었다. 프로야구에서 뛴 경험이 있고, 국제 무대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한 데다, 준수한 외모로 스타성까지 갖춘 이대은은 자연스럽게 그해 최대어로 꼽혔다. 2017년 최하위에 그쳐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KT 위즈는 고민 없이 이대은을 뽑았다.
문제는 이대은의 입단 후 성적이 입단 전 화제성에 한참 못 미쳤다는 거다. 이대은은 첫 시즌인 2019년 44경기에서 4승 2패 17세이브, 평균자책점 4.08을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부상과 부진 탓에 승리 없이 4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5.83의 성적표를 받았다. 시즌 종료 후엔 팔꿈치 문제로 수술대에 올라 지난해 7월에야 1군에 올라왔다. 지난 시즌 31경기 성적은 3승 2패 1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3.48. 직구 최고 구속이 154㎞까지 올라와 조금씩 진가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즌 종료 후 공개 연인이었던 래퍼 트루디와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이대은은 지난 1월 13일 전격 은퇴를 발표했다. 큰 부상도 없고, 1군에 머물지 못할 만큼 기량이 하락하지도 않은 33세 투수라 더 놀라운 뉴스였다. 불과 3년 전 2차 1라운드로 지명한 투수를 갑자기 잃게 된 KT 구단과 코칭스태프도 황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끈질긴 도전 대신 퇴장을 택한 이대은은 구단을 통해 "부상으로 팬과 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보탬이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은퇴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야구에 대한 미련은 없다. 다만 야구장에서 선후배님들, 그리고 팬분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는 심경을 전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