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스트레스로부터 도피 차원…퇴사 후 연락처 지우는 등 연결고리까지 ‘뚝’
“친구와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바일 메신저 ‘라인’에서 그 친구를 차단하고, 전화도 차단해버렸어요. 약간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만날 때마다 늘어놓는 자기 자랑과 직장 험담에 질려버렸거든요.”
도쿄에 거주하는 회사원 세토 씨(40·가명)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일본 매체 ‘여성세븐’에 의하면 “세토 씨처럼 돌연 주변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이란 일본의 세태를 반영하는 신조어 중 하나로, 정식 병명은 아니다. 흔히 컴퓨터가 오류 나면 리셋 버튼을 눌러 시스템을 재부팅하는 것처럼 인간관계 자체를 초기화하는 걸 말한다. 요컨대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이를 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단절하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는 단절하는 대상이 한두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연락처를 모두 지운다든지, SNS 계정을 탈퇴하고 새로 계정을 만들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이직과 이사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 아베마TV에는 “지금까지 10회 이상 인간관계를 리셋했다”는 30대 남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직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선배, 얕잡아보는 후배 등 껄끄러운 상대가 있다면 퇴사 등의 방법으로 환경을 바꿔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지워 버렸다.
남성은 “좋아하는 친구라도 싫어하는 사람과 연결됐을 경우 모두 리셋 대상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왜 나만 연락을 끊고 다른 사람과는 연락하느냐’는 원망을 듣기 싫어서다. 그는 “단절하는 것이 속 편했다”면서 “주위 눈치를 보고 신경 쓰는 성격이라 ‘전부 삭제’를 선택하게 됐다”고 전했다.
정신과 의사 이노우에 도모스케 씨는 리셋하는 이유에 대해 “인간관계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단점은 ‘회피, 도망치는 버릇이 생긴다’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 구축이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더욱이 “인간관계를 리셋한 후 후련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주로 거절에 서투르고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 성격, 성실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지쳐버려서 ‘번아웃(탈진)’ 상태가 된 사람, 반대로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만사가 귀찮은 사람도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에 빠진다.
여기에 하나 더. 정신과 의사 가바사와 시온 씨는 “100 아니면 0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 사고의 소유자도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이 되기 쉽다”고 말했다. 본래라면 “싫은 상대와 연락을 줄이고 만나지 않으면 될 뿐인데, 연결고리가 있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 관계를 리셋한다”는 설명이다.
‘100 아니면 0,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는 우울한 상태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레이존(Gray zone·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지대)을 용인할 수 없게 되며, 무엇이든 결론을 서둘러 내린다. 가바사와 씨는 최근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이 늘어나고 있는 배경에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도 원인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스트레스가 증가해 이전이라면 충분히 참을 수 있던 일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갑작스레 인연을 끊는 건 신중해야 할 일이다. 본래 누군가를 ‘싫다’라고 느끼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기까지는 몇 단계를 거치게 된다. 돌연 연락을 끊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한 한계에 부딪혔거나 뚜렷한 악의가 생겼을 때다.
가령 심리학에는 ‘호의의 보답성’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먼저 호의를 보이면 상대도 나에게 호의를 갖게 된다는 법칙이다. 역으로 미워하거나 나쁘게 평가하면 그 상대에게 미움을 받는다. 이와 관련, 가바사와 씨는 “리셋 행동을 하기 전에 ‘인연을 끊은 뒤 어떻게 될지’를 한번 떠올리기 바란다”고 조언했다. 별 생각 없이 관계를 끊을지 몰라도, 상대는 불쾌한 마음에 지인 모두에게 당신의 험담을 퍼뜨릴 수 있다. 또 관계성에 따라서는 보복도 가능하다.
가바사와 씨는 “그 사람과 인연을 끊는 것이 정말 필요한지 심사숙고하고, 그래도 인연을 끊고 싶다면 점차 멀어지는 ‘페이드아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정신적·신체적인 폭력 등 피해가 분명히 있다면 바로 절교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므로, 이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리셋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나지 않게, 사무적으로 대응해 멀어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부연설명이다.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 진단 테스트
A타입과 B타입, 각각 나눠서 몇 개가 해당되는지 체크해보자. 한 문항 당 1점으로 계산한다. 많은 쪽이 당신이 속하는 타입. 그리고 11번에 해당되는 사람은 속하는 타입에 1점을 더 추가하면 된다. 가령 3, 7, 8, 10, 11번에 해당되는 사람은 B타입이며, 점수는 총 4점이 된다.
[A타입]
1. 상대의 표정,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
2.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쓴다.
3.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다.
4. 완벽주의자 성향이다.
5. 자존심이 강한 편이다.
[B타입]
6. 만사가 귀찮은 ‘귀차니스트’다.
7. 혼자 행동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
8. 요령이 좋은 타입이다.
9. ‘둔감, 눈치가 별로 없다’ ‘마이페이스(자기스타일대로 나가는 성격)’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10. 자포자기 성향이 있다.
[그외]
11. 사물이나 인간관계를 손익계산으로 따지는 경우가 많다.
#결과
어느 타입이든 점수가 4점 이상인 사람은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이 되기 쉽다.
만일 A타입이라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고 습관을 고쳐나가도록 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B타입은 타인의 감정을 읽는 것에 서투르고, 자신의 감정에도 둔감한 경우가 많다. 리셋하고 싶어질 때는 ‘주위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차분히 생각하도록 한다. 또 스트레스가 쌓이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자기방임 성향도 있으니 평소 일상을 소중히 보내는 데 유의한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