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황희찬·김민재 등 최정예 풀가동…반드시 이겨야 본선 조추첨 유리한 고지 밟아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는 것이 결정된 상황, 이번 예선 일정에서 팬들의 초점이 맞춰지는 부분은 이란전이다. 이란은 아시아 최강국으로 평가받는 팀이다. 지난 2월 발표된 피파랭킹에서도 21위에 랭크, 대한민국과 일본 등에 앞서며 아시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 대신 이란, '신 라이벌'로 급부상
이란은 우리나라에 새로운 라이벌로 부상했다. 당초 우리의 최대 라이벌 국가는 일본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주요 대회에서 한일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과 한 조에 편성돼 맞대결을 펼친 것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이 마지막이다. 당시 맹활약을 펼친 최용수, 하석주, 이민성 등은 모두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감독님’ 소리를 듣게 된 지 오래다. 아시안컵에서 성사된 한일전도 2011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으로 10년이 훌쩍 지났다. 동아시안컵이 개최되며 2년마다 한국과 일본이 만나지만 일부 전력이 제외되며 일각에선 '맥빠진 경기'라는 평을 내린다.
반면 한국과 이란의 경기는 주요 길목마다 펼쳐지며 새로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과 이란이 본격적으로 '불꽃'을 튀긴 계기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이다. 최종 예선 단계에서 만난 두 나라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이란이 다소 여유 있게 승점을 쌓아놓은 상태에서 한국은 탈락 위기에 몰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2013년 6월 이란전이 울산에서 열렸다. 앞서 열린 이란 테헤란 원정에서 1패를 안은 한국은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도 한국은 0-1로 석패했다. 경기 전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카를로스 케이로스 당시 감독은 승리를 확정 짓자 한국 벤치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도발했다. 그저 아시아 강팀 간 맞대결이던 한국-이란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공포의 대상 이란
뜨거웠던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을 포함해 한국과 이란은 최근 네 번의 월드컵 예선(2010 남아공, 2014 브라질, 2018 러시아, 2022 카타르)에서 한 조에 편성돼 경쟁을 펼쳤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월드컵 예선에서 이란을 만나 승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남아공 월드컵 예선 이란전 홈과 원정에서 박지성이 모두 득점하며 2경기 연속 무승부를 거둔 이후 브라질 월드컵과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 3연패 기간이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원정팀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은 이란 테헤란 원정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한 경험이 없다. 이전까지 테헤란 원정에서 무승부로 승점을 따낸 경기조차 2009년 박지성 득점 경기가 유일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시절 테헤란 원정에서는 단 한 개의 슈팅조차 때리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지난해 10월 벤투호 체제에서야 손흥민의 선제골 이후 무승부를 기록하며 연패를 끊어냈다.
이란과 라이벌 의식은 최근에야 타오르게 됐지만 대표팀 역사에서 이들은 이전부터 악연을 이어왔다. 이란과 A매치 초창기 역사에서 3연승 이후로 한국은 꾸준히 이란에 열세를 보여왔다.
이란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시점은 1970년대였다. 대표팀은 1972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컵 결승에서 이란을 만났다. 당시 차범근, 박이천, 김호 등을 앞세우며 아시아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대표팀은 이란에 1-2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충격과 공포'로 남은 이란전은 1996년 아시안컵 8강전이다. 우승을 노리던 대표팀은 김도훈, 신태용의 연속골로 앞서 나갔지만 이란의 스타 알리 다에이에 4골을 허용하는 등 2-6로 참패했다. 이 경기의 여파로 당대 최고의 스타 감독이던 박종환 감독은 대표팀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처럼 이란은 주요 길목마다 한국의 발목을 잡아왔다. 아시아 내 역대 전적에서 한국 대표팀이 열세를 보이는 드문 국가다. 1958년 첫 A매치 이후 한국은 이란을 상대로 32경기를 펼쳐 9승 10무 13패를 기록했다. 이란전 마지막 승리는 2011년 아시안컵 8강이다. 당시 연장 승부에서 윤빛가람의 골에 힙입어 승리를 거뒀다. 정규시간 내 따낸 승리는 20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란은 어떻게 아시아 맹주가 됐나
이란은 한국에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현재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 A조 1위(7승 1무)를 달리고 있으며 FIFA 랭킹도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호주, 사우디 등 대부분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상대전적에서 우위를 보인다.
이란의 강세는 특유의 피지컬에서 오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란은 위치상 아시아 국가지만 인종적으로는 유럽으로 분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윤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체격이나 파워, 스피드 등이 아시아 국가와 다르다. 과거 이란과 붙어봤을 때도 실제 버거움을 느꼈다. 축구에서는 피지컬이 중요하지 않나. 그런 탄탄한 피지컬에 기술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다"며 "이란의 홈 이점도 무시할 수 없다.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있다는 점도 원정팀 입장에서 부담스럽다"고 설명했다.
이란 자국리그의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는 점이 되레 국가대표팀 전력에는 상승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산유국 다수는 이란과 마찬가지로 국가 내 축구 열기가 뜨겁다. 각국에서 벌어지는 리그에도 많은 투자가 이뤄진다.
하지만 이란은 사우디 등과 사정이 다소 다르다. 리그 수준은 떨어지지 않지만(아시아축구연맹 리그랭킹 4위) 사우디나 카타르에 비해 선수 연봉 등과 관련해 투자가 적다. 이 같은 상황은 많은 스타들이 높은 연봉을 보장받으며 자국 리그에 머무는 타 중동 국가와 달리 이란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유럽 진출에 도전하는 이유가 된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프로축구가 출범한 것도 이란 선수들의 해외 진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중동의 국가대표 선수들 대부분 자국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면, 이란은 주축 선수 다수가 ‘큰 물’인 유럽 주요 리그에서 뛰고 있다. 이란 주포 사다르 아즈문과 메흐디 타레미는 각각 레버쿠젠(독일)과 FC 포르투(포르투갈)에서 뛰고 있다. 2018년에는 알리레자 자한바크슈가 네덜란드에서, 2020년에는 아즈문이 러시아에서 득점왕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외에도 잉글랜드, 네덜란드, 크로아티아, 터키, 그리스 등 유럽 각국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팀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이 많다.
이웃 중동 국가에 비하면 투자 규모가 적다지만 이란 리그인 페르시안 걸프 프로 리그를 이끄는 페르세폴리스, 에스테그랄 등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다. 이란 대표팀 명단도 유럽파를 제외하면 상당수가 두 팀 소속 선수들로 채워진다. 특히 최근 리그 5연패 중인 페르세폴리스는 2020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울산 현대와 아시아 최강 자리를 놓고 다툰 바 있다.
월드컵 본선행을 조기에 확정 짓는 등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벤투호에 이란은 꼭 넘어야 할 산이다. 다가오는 이란전 승리는 단순한 1승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대표팀의 FIFA 랭킹 상승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기 때문이다. FIFA 랭킹의 상승은 월드컵 본선 조추첨에서 유리한 고지를 밟을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분위기는 좋다. 그간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란전과 달리 벤투호는 지난해 테헤란 원정에서 선제골을 넣는 등 자신감을 가질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승리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는 대한축구협회 역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경기를 열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역대 서른세 번째 이란과 A매치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